의도치 않게 몇 주간 왜 고전(Classics)을 읽는지, 나아가 왜 책을 읽는지에 대한 질문을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받았다. 입대 직전 삶의 가늠좌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희구하는 이, 어떤 삶을 골라야 자기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 수 있을지 궁리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중 “수업적합성”과 매우 떨어지는 책들을 왜 굳이 찾아서 읽는지에 대한 질문 아닌 질문은 개인적으로 (여러 의미로) 가장 와닿은(?) 질문들 중 하나였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선 고전은 중세이전의 저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시간의 때를 탈지언정 그 가치가 여전히 빛나는 저서를 통칭한다. 그 시대의 모든 인고의 사고체계를 가장 극명하고 명쾌하게 드러낸 작품일수록 고전의 반열에 오르며, 그들의 정수에 흠뻑 심취해 받아들이는 자세는 곧 거인의 어깨에 가장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왕도(王道)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개인의 ‘선택’을 거쳐, (효율과는 거리가 그리 가깝지만은 않은) 책을 현명하게 ‘소비’하겠다는 일념으로 고른 ‘효율성’은. 과연 ‘최적’의 결과를 이끌 수 있을까? 분명 표출된 현상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전문적인 연구는 가능해질 테지만. 역설적이게도 공법에 자신을 가둬놓은 채, 사변적인 논쟁이 쉬이 빠질 것이다. 궁극적인 질문은 (혹은 근원적인 이유는) 장르불문 동시다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말이다. [동서(東西)와 학문(學問)을 막론하고, 양차대전 시기즈음의 지성인들이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조조 래빗> 中
사후적이지만, 책을 경시함으로써 파생된 자만심 (Hubris)은 (높은 확률로) 파국(Nemesis)으로 이어졌다.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인간도 불태운다”라고 경고한 하인리히 하이네의 말처럼, 요제프 괴벨스가 주도한 나치독일의 분서(焚書) 행위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간 발생한 문화'대숙청'은 각각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치렀다. (전자는 파시즘의 광폭으로 이어져 당시 전 세계 인구의 대략 3%의 목숨을 앗아갔고, 후자는 유교 발상지임에도 유교연구를 위해서는 인근 국가의 기록물을 역수입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
이는 자만심을 깨뜨려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 있어(혹은 자신을 비워냄과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데 있어), 독서가 큰 축을 담당해 왔다는 점을 반증한다.
매일 새로운 여왕과 결혼해야 하지만, 여왕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죽이지 못하는 왕의 이야기 <천일야화>
개인이 책을 읽는 이유에는 무수한 동인이 존재하고, 이는 마땅히 존중받고 장려돼야 한다. 한편, 개인적인 견해로써 책을 집어 들어서 읽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들 중 하나는 호기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천일야화>나 <신들의 계보>와 같은 고전들은 우리에게 호기심은 때로는 비극을, 때로는 예정치 못한 선물을 내려주는데, 이를 어떻게 슬기롭게 길러내야 할지(channel) 끊임없이 질문하고 간접적으로 답변해 준다.
그럼에도 개인의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지적 탐구는 종종 타인에게 ‘잡지식’이라고 폄하되는 경향이 매우 강한데, 과연 그들이 말하는 잡지식에 반대되는 ‘참지식’은 따로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식’을 자기 식으로 꿰어내 발화하고자 시도하는 것. 이것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이지 않을까? 자연히 자신만의 생각과 해석은 풍부해질 것이다.
물론 지식이라는 탄탈로스(Tantalos)의 늪에 빠진 채, 닿을 듯 말듯한 위치에 맺힌 과실을 쥐고자 하염없이 고행하라고 제언하는 것이 아니다. 교조적 합리주의가 아닌, 경험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삶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는 것이 힘이다”로 우리에게 익숙한 경험주의자 프랜시스 베이컨도 4가지의 우상(극장의 우상, 동굴의 우상, 종족의 우상, 시장의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자세를 매우 장려했다.
단순히 권위자의 견해니까(극장),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니까(동굴), 현재 나에게 불필요한 정보니까(종족), 으레 그래왔으니까(시장)라는 생각으로 격물(格物)한다면. 격물치지(格物致知)에는 절대로 도달할 수가 없거니와, (우상에 침잠된다면) 언제나 지고(至高)의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있게 선언해 온 인간의 존재의의는 대관절 무엇이 될까? 어차피 모든 것은 외부적인 변화에 수동적으로 반응(re-act)만 하면 되는 것일 텐데 말이다.
그렇기에 복잡 다변한 세상(universe)에 대한 탐구는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벽에 가깝게 궁리(窮理)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인문학(Liberal Arts)은 본인을 알아가는 과정의 이정표로 기능한다. 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창(窓)을 만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같은 유수의 서양 과학자들도, 엄연히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신실한 믿음을 기반해,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더 잘 설명해 내고자 천문을 탐구했다.
그리고 영적인 기독교와 과학의 결합은 곧 지적겸손함을 배태시켰다. 이 논의의 연장선 상에서, 고유명사처럼 굳어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존의 믿음을 깨뜨려 쾌도난마(快刀亂麻)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내는 ‘발상의 전환’이 아닌, 다양한 의견 교류의 물꼬를 틔운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확(的確)할 것이다. 역사는 하나의 개인이 분기점이 되어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며, 책은 이러한 엄숙성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던져준다.
이후 사람들은 숫자가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임을 체득해, 이를 통해 세상은 분석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의 토마스 홉스 또한 숫자를 활용해 사회를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저술활동에 매진하게 되며, 이러한 접근법은 19세기의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숫자를 통한 비교는 분명 유용한 가늠좌임에 틀림없다. 한편, 이러한 내면의 인고의 사고과정을 일절 무시한 채, 숫자를 곧 진리불변이요, 절대자라고 믿는 순간. 모든 현상을 “물질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으로 다루게 된다는 것인데. 과연 이것에 대한 제동 장치는 만들어질 수 있을까? 또한, 패턴이 보일 수 있을지언정, 절대적인 법칙은 존재할 수는 없을 인간사에서, (절대법칙이 있다고 믿는 인식 속에서 행한) ‘선택’ ‘소비’ ‘효율성’ ‘최적’은 과연 "영원히" ‘최적’ 일 수 있을까? 오히려 유연한 사고를 가지기 위해 끊임없이 확장된 독서를 행해 조화로운 선택을 내리려고 늘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역설적이지만 더 최적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