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여간 해오던 재택근무가 사라진 지 3개월. 좋은 날 다 갔다며 한탄하던 게 엊그제였지만, 적응의 동물답게 언제 그랬냐는 듯 주 5일 출근을 해내고 있다. 실내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 이외에는 사실상 역병의 전운은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길어진 낮의 끝이 걸친 거리 곳곳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3년 만에 돌아온 축제들이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직장인 계급인만큼 생활의 변화가 가장 와닿는 곳은 직장이다. 동호회, 회식, 체육행사, 집합교육 등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것들이 돌아왔다.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비(非)언택트 행사를 회사 사람들은 벼르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사라진 사내 행사들의 부재를 내심 좋아했었지만 요즘은 퇴근 후에도 자주 회사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지난주엔 부서 단체로 야구 관람을 다녀왔다. 외야 단체석에 바리바리 싸온 각종 먹을거리를 펼친 채 직사광선에 덥혀진 몸을 시원한 맥주로 적셨다. 야구 자체엔 그다지 흥미가 없지만 현장 분위기를 느끼며 부서원들과 마시는 맥주는 훌륭했다. 단체석엔 우리 말고도 직장인으로 추정되는 여러 그룹이 자릴 잡고 있었다. 부장 이상으로 보이는 분이 앉아있는 헤드테이블이 중앙에 포진된 그룹을 보며 K-직장인의 모습은 대동소이하는구나 느꼈다.
경기는 홈팀의 대패로 싱겁게 끝났다. 그렇지만 별 상관없었다. 회사 사람들과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시원한 여름밤에 함께 맥주를 마시고 웃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무실에서 갑갑한 마스크를 낀 채 나누었던 대화와 분위기는 야구장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가족 같은 회사는 아니더라도, 각자의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좋은 분위기의 회사에 다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작년 초부터 인사발령을 받아 근무하기 시작한 내 부서는 부장님을 포함한 15명이 모두 남자다. 부장님 밑으로 차장님 두 분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서로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이 내 또래의 MZ세대다. 업무 중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으쌰 으쌰 서로 챙겨주고 같이 고민한다. 그래서인지 회식 참여율도 높은 편이다. (절대) 강제로 회식 참여를 종용하진 않는다. 무엇보다 역병이 도래하기 이전보다 회식이 덜 부담스러워져 더 참여하게 된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코로나 이전 우리 회사에는 특유의 '잔 돌리기'라는 회식문화가 있었다. 상대방과 내가 서로 마시던 잔을 번갈아가며 주고받은 뒤 술을 따르는 예절(?)이다. 입사 때부터 줄곧 이 예절의 존재에 의문과 반감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NO를 외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이 비위생적인 문화는 위생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역병 덕분에 사라졌다. 이제는 회식자리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던 잔들은 제자리를 찾았다. 각자의 소중한 잔에 각자의 소중한 주류를 마신다. 돌아가지 않는 술잔을 앞에 둔 회식자리는 한결 수월해졌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사라진 것들이 아쉽기도 다행이기도 했으며, 그렇게 다시 사라졌다 돌아온 것들이 다행이고 아쉽기도 한 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원래 살던 모습이 꽤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2D 액정화면이 아닌 4D 실사세계에서 부대끼고 어울려 사는 게 결국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역병 덕분에 그 부대낌의 허용오차를 깨달았으니 우리는 더 현명하게 소중한 사람들과 내일을 함께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