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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Dec 29. 2021

봄을 기다리며


    ‘철퍽, 철퍽, 철퍽, 철퍽.’


    눈 쌓인 개울가에 아낙의 빨래 방망이질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진다. 은비녀로 쪽을 진 머리에 무명치마 바짝 올려 입고 쪼그려 앉아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낙의 뒤태가 낯설지가 않다.


    “엄니?”

    아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쁘게 손을 놀리며 대답한다.

    “아따, 우리 희명이 왔냐잉? 빨랫감이 겁나게 많제? 이리 내려 논나. 오매가 깨깟허게 방맹이로 두들겨 줄탱께, 니는 살살 헹구기만 혀라잉.”

    “엄니는 얼음물이 차지도 않는갑네, 나는 손이 시려서 당최 담그지도 못허겠소.”

    “시상에 얼음물 안 찬 사람이 어딨당가. 다 맴 묵기 달렸제. 그래 헐랭 헐랭하믄 옘뱅헐 세상 못 산다 안 했냐잉. 그저 앙당물고 살아야 써.”

    “그르게 나가 엄니 말 명심허고 살아볼라 허는디, 사는 게 와이리 한겨울 개울물 맹키로 시린지 모르것소.”

    “동생들 본다고 혼자 고생허지 말고 너라도 따숩게 살라고 시집보내 놨더만 그라고 춥냐잉?”

    “긍께 내가 시집 안 간다 안 혔소,  매커랍시 시집은 가락혀서…”

    “쯧, 하기사 사는 게 여간 까탁시러븐게 아니여 …”

    “엄니, 그란데 이라고 기다리면 봄이 오긴 올랑가? 나는 늘 그것이 궁금허요.” 

    방망이질하던 손을 멈추고 어머니가 일어나 돌아본다. 젊은 얼굴을 한 나의 어머니.

    “밥은 묵고 다니냐잉? 아나, 이거라도 먹그라.”


 어머니가 내 두 손에 무언가 쥐여준다. 내려다보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슬한 감자 한 알이 놓여있다. 아버지 서슬에 집에서 쫓겨나 보릿고개를 나던 시절 동생들에게 양보하느라 먹고 싶어도 꾹 참던 찐 감자. 감자의 온기가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진다. 눈물이 차오르는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는 온데간데없고 텅 빈 한 겨울 빨래터에 나 홀로 덩그마니 서 있다.


    “엄니? 엄니!! 엄니!!!” 




    “엄마! 엄마 왜 그래? 좀 일어나 봐!”

    “으응?” 

    설이가 흔들어 깨우는 통에 나는 개울가 빨래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딸아이 집 소파에 누워있다 퍼뜩 잠이 들었나 보다. 

    “무슨 꿈을 꾸길래 그렇게 팔까지 내저으며 ‘엄니’를 목놓아 불러?” 갈라진 목소리로 설이가 묻는다. 

    “아… 니 외할머니가 꿈에 보여서.”

    “엄마가 할머니 보고 싶었나 보네. 꿈에도 나오시고… 내 꿈에도 좀 찾아오시지… 나도 할머니 보고 싶은데…” 

    설이가 멍한 눈으로 낮게 말했다. 

    “할머니가 머라고 하셔? 잘 지내시는 것 같아?”

    “응…따끈한 찐 감자 한 알 주고 가시더라.”

    “그럼 좋은 꿈 아닐까? 엄마 삶은 감자 좋아하잖아.” 설이는 살짝 눈을 빛내며 말한다.

    “그러게, 좋은 꿈이면 우리 딸 아픈 거 싹 나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딸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토록 보고 싶어도 좀처럼 꿈에서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었을까? 얼싸안고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는데 감자 한 알 쥐여주고 끝나버린 꿈에 긴 아쉬움 남았다. 젊지만 슬픔이 가득한 엄마의 얼굴. 성인이 된 이후 줄곧 서울에 살아서 이젠 사투리가 가물가물한데도 그 시절 엄마를 보니 어릴 때 마냥 사투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한겨울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계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


 어린 시절 나는 엄마가 두껍게 언 강을 깨고 맨손으로 빨래를 해도 엄마라 손이 시리지 않은가 보다 했었다. 결혼하고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 맨 몸뚱이로 삼 남매를 키워야 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개울가 꽁꽁 언 빨래터에서 빨래를 했다. 두꺼운 목장갑을 겹으로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을 낀 채로 빨래를 해도 살을 애는 듯한 개울물에 뼛속까지 한기가 드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엄마가 맨살로 느꼈을 추위와 고통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다.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처럼 나는 정말 엄마는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었다. 가슴 아프게도 그 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선 따뜻하게 살라고 날 시집보냈다니… 어머니 뜻대로 살아드리지 못한 게 죄스러워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머니는 20년 전 세상을 떠나셨다. 첩실에 빠진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 형제를 걸핏하면 집에서 쫓아냈다. 쫓겨났다가 집으로 돌아갔다를 반복하던 우리 육 남매는 갖은 고생을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다 아버지는 영영 어머니와 우리를 떠나버렸다. 모진 세월을 술로 달래며 살던 어머니는 결국 간암에 걸려 복수가 차올라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 결혼생활을 하고도 내가 시집가기를 그토록 원하셨던 이유를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나는 시집간 딸과 손주가 있는 할머니다. 진정 내 딸은 결혼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설이 녀석도 제 인생에 결혼은 없을 것이고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며 큰소리를 처댔었다. ‘그래 넌 똑똑하고 당당하게, 네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라’ 하며 내심 그런 딸아이를 응원했다. 그랬던 설이는 어느 날 무엇에 홀린 듯 홀연 시집을 가버렸다. 그것도 호주 유학길에 만난 남자랑 결혼해 시드니로 이민을 갔다. 심장에 구멍이 난 것 같기도 하고 사막에 홀로 서있는 듯 무력감을 느꼈다. 고개를 드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억누르며 아이가 알콩달콩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정말 평범하게 살아주기만을 기도했다.  


 평범한 삶이란 가장 원대한 꿈인지도 모르겠다. 설이는 결혼 후 1년이 되지 않아 아이를 갖었고, 출산 후 계속 몸이 아프다며 병원을 전전했다. 일 년여 만에 알아낸 병명은 ‘섬유근육통’이었다. 난치성 희귀 질환이라는데 전신에 못이 박힌듯한 통증이 온몸을 옮겨 다닌다고 한다. 피붙이 하나 없이 아픈 몸으로 어린 딸을 돌보는 설이를 못 잊어 나는 지금 시드니에 와있다. 지난 세월 몸이 고된 것도 참을 수 있었고 아버지나 남편 때문에 가슴에 생채기가 나는 것도 견딜 수 있었다. 자식은 달랐다. 젊디 젊은 딸자식이 언제 나을지 모를 병으로 시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가슴이 피멍으로 물들어 간다. 

 

어머니는 내 마지막 질문에 왜 대답하지 않으셨을까? 기다리면 봄이 오긴 오는 건지 속 시원히 이야기 좀 해주고 가시면 좋았으련만. 반백의 머리가 되어도 확신이 서지 않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설이에게 만큼은 똑 부러지게 말해주고 싶었다. 생기를 잃은 채 멍한 그 아이의 눈을 마주 보고, 조금만 더 힘을 내어 견디라고, 다시금 네 인생에 꽃 피는 봄이 오리라고 말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말들이 목 안에서 웅성거릴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오늘도 마른침만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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