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마을 mh빌라 5층 501호.
3년 만에 한국을 방문해 묵고 있는 숙소다. 오래된 4층짜리 빨간 벽돌집 옥상에 가건물을 짓고 방을 내고 편백나무로 거실을 두른 집이다. 창밖으로는 인왕산 북한산 북악산이 보이고 비슷한 높이의 연립주택 옥상이 마주 보인다. 창문을 열고 편백나무 창턱에 올라앉으면 앞 집 옥상에 피어난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인사를 건네 온다. 자동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 어디선가 수런거리는 사람들 소리, 까치 소리 고양이 소리 온갖 소리들이 정겹게 섞여 들어 귓가를 간지럽힌다. 무엇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는 놀랄 만큼 친기숙하고도 다양한 냄새가 섞여 있어 한참을 턱을 괴고 킁킁거리기만 해도 지루하지가 않다.
옥상에 널어둔 깨끗한 빨래 냄새, 어느 집 욕실에 열린 쪽 창문 사이로 날아오는 샴푸 냄새, 근처 시장통 방앗간이나 떡집에서 풍겨오는 듯한 구수한 기름 냄새, 맡기만 해도 무슨 반찬인지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음식 냄새. 여기에 창문턱에 새워둔 화병 속 국화향이 가을을 알리는 청량한 온도의 바람에 스며들어 코를 타고 들어와 심장을 설레게 하고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그 온도, 공기, 냄새들 속에는 역사가 담겨있고 추억이 새겨져 있고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 그리하여 눈을 감고 바람결에 나를 맡기면 사뿐히 그 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어느 겨울 저녁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던 골목길. 들판의 탄내와 뒤섞인 밥 짓는 냄새를 맡으며 나는 엄마가 보이는지 목을 쭉 빼고 멀리 살피며 걸어간다. 가로등도 드문드문한 시골길에 차가 지나갈 때면 눈이 부셔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다시 눈을 깜빡이고 앞을 살피자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아빠의 커다란 베이지색 오리털 파카를 걸쳐 입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파마머리를 한 젊은 나의 엄마.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엄마는 점점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양쪽 주머니에 손을 꽃은채 나를 향해 파카를 활짝 열어 보인다.
달려가 엄마 품에 뛰어들면 엄마의 온기와 우리 집 냄새가 나를 감싼다. 미모사 향 섬유유연제 냄새, 오늘 저녁 반찬 냄새, 그리고 도브 비누 향이 옅게 풍기는 엄마의 살결 냄새가 뒤섞여 세상에서 유일한 엄마 냄새가 되어 나를 반긴다. 그 순간의 엄마와 내가 옥탑방으로 날아드는 바람 속에 그렇게 녹아있다.
또는 대학교 후문 앞 가로등 아래서 지긋이 남자 친구의 눈동자를 올려다보는 나도 있다. 낮에는 여름이 남아있던 10월 얇게 입고 나온 초록 체크무늬 셔츠 덕에 저녁 무렵의 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느껴진다.
어떤 열기 같은 일렁임을 담고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소년도 청년도 아닌 남자 친구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추운 건지 설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뭐라고 나에게 말한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눈동자 안에 담긴 일렁임만은 같은 계절 같은 온도의 공기가 피부에 닿는 순간 자동 반사처럼 떠오르곤 한다.
한국으로의 여행이 좋은 이유는 너무나 많다. 가족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나의 소울푸드를 먹고 추억의 장소를 갈 수 있다. 하지만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거리를 걷고 이곳의 공기, 바람을 대하는 그 모든 순간 그 어떤 여행도 줄 수 없는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다. 3년 만에 방문한 나의 나라에서 나는 나를 만나고 간다.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내 안의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