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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Mar 17. 2022

아빠들의 양 손이 무거운 이유

찹쌀떡과 메밀묵

 또 손이 간다. 소파에 모로 누워 티브이를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앞에 놓인 자주색 나무 궤짝을 활짝 열고 안에 든 것들을 이리저리 살핀다. 약과 한 봉지를 스윽 꺼내 기계적으로 오물 거린다.


 우리 집은 소파 앞에 티 테이블 대신 바퀴가 달린 커다란 원목 궤짝을 가져다 두었다. 그 궤짝은 티테이블이자 우리 집 간식 창고다. 남편은 종종 양손 가득 한국 과자를 사들고 들어와 그 보물 창고를  채워놓곤 한다. 약과나 한과, 만주 등 추억의 간식부터 유명한 한국 과자들까지 종류도 다양하다.정작 본인은 바빠서 자주 먹지 못하고 최대 수혜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는 나와 딸아이가 되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그 상자에 간식이 그득한 것을 알고 있는 나의 뇌는 책을 보거나 TV를 보며 소파에 앉아있으면 아주 은밀하게 손에게 지령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 딸도 스리슬쩍 2층에 올라와 하루에도 몇 번씩 궤짝 문을 여닫는다.


 아이스크림을 사도 한 보따리, 과자를 사도 한 보따리를 사 오는 남편을 보면 내가 살이 안 빠지는 건 다 당신 탓이라며 타박을 한다. 오물오물 약과를 먹고 있자니 갑자기 그런 남편의 모습이 어린 시절 아빠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엄마가 깔아주신 요 위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아빠 차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야호!'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언제 자려고 했냐는 듯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동시에 내복 차림의 오빠들도 후다닥 자기들 방에서 날듯이 뛰어나왔다.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우리 셋은 합창을 하며 폴더폰처럼 허리를 숙였지만 눈은 아빠가 아닌 아빠의 양손에 들린 하양 비닐봉지에 가 있었다. 한쪽  봉지에는 투게더 아이스크림과 당시 슈퍼에 최고급  엑설런트 아이스크림이, 다른 쪽 봉지에는 군고구마와 군밤이 들어있었다. 작은오빠와 나는 겨울 냄새 가득 베인 아빠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양손에서 봉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예의 삼 남매는 서로 한 입이라도 더 먹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며 야식 파티를 했다.  아빠는 언제나 우리가 잠들면 퇴근을 하셨기에 그런 날이면 산타할아버지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어떤 날에는 세상 귀한 바나나와 멜론을 사 오시기도 했다. 당시에는 백화점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는 귀한 과일이었기 때문에 바나나킥으로 바나나맛을 알던 우리에겐 사치의 절정과 같은 간식이었다.


 함박눈이 소록소록 쌓이던 어느 밤엔 일찍 귀가하신 아빠가 텅 빈 손으로 들어오셔서 삼 남매를 대실망시킨 적도 있었다. 아빠는 우리의 표정을 보고 다 안다는 듯 반달눈을 하고 웃으셨다. “조금 기다려봐, 아빠가 배달시켰어.” 창에 비친 가로등 불빛 아래로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 그림자가 보였다. 어린 마음에도 이런 날 배달 같은 게 올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실망에 찬 얼굴로 입을 삐죽거리고 있을 때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처음에 아주 작아서 사람 소리인지 새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다가 점점 더 커지더니 이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찹쌀 떠 억~~ 메밀 무욱~~~.”  마지막 단어를 길게 뽑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외치는 그 소리는 겨울밤 적막한 시골 동네에 은은한 운치를 더했다. 시장통에서 무언가를 사라고 시끄럽게 외쳐대는 소리와는 달랐다. 마치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처럼 가락 있고 시린 무언가가 있었다.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나가 찹쌀떡 장수를 불렀다. 커다란 등짐을 지고 들어온 아저씨는 눈이 소복이 얹힌 윗 덮개를 열고 찹쌀떡과 메밀묵, 약과 등속을 보여주었다. 거의 다 팔고 몇 개 남지 않은 것을 아빠는 모두 달라고 했다. 아저씨는 꽁꽁 언 얼굴을 따뜻한 보리차 한잔으로 녹이고 한 층 밝아진 얼굴로 길을 떠났다. 어쩌면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간식을 사서 집으로 향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의 아빠는 우리가 성장하는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시진 못했다. 그 미안함이 퇴근길 아빠의 양손을 무겁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몸은 일터에 있었지만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있고 싶었다는 것을. 그렇게 쌓아준 소소한 기억들은 거창하게 떠났던 여름 바캉스보다도 더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있음을 과연 아빠는 알고 계실는지. 내복 바람의 내 안의 아이는 아빠 목을 안고 귀에 속삭인다. '아빠 사랑해요.'


남은 약과를 입에 넣으며 나는 또 생각한다. ‘남편간식 보따리들을 환대해 줘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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