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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헤라자데 May 08. 2020

희망이 남기고 간 선물

나이 마흔에 시작한 도전 

지금으로부터 1년 전, 나는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마흔을 앞두고 있었는데,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친구에게 실연당하고 ,다니던 직장을 자의반 타의반 퇴사하고, 건강까지 나빠져 있었다. 가진 돈도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받을 수가 없었고 아주 조금밖에는 남지 않았다. 한마디로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처지였다.

  염치불구하고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로 들어가 의식주는 해결하고 살았지만, 온갖 상처로 얼룩진 마음의 병은 쉽게 낫지 않았다. 방안에 틀어박혀 인터넷을 하거나 빈둥대기 일쑤여서 살이 순식간에 10킬로그램이 쪘다. 과거에 사 놓았던 옷들은 몸에 맞지 않아 몽땅 내버려야 할 판이었다. 나의 자존감은 형편없이 낮아졌다. 

 그 당시 나는 명절을 특히나 싫어했는데 집안 대소사가 있어 친인척들이 모이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방안에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한마디로 집안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외톨이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 자신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살다가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면 너무나도 불안해서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아르바이트라도 하려고 공공 도서관 사서 보조로 들어갔지만 첫날 식은땀을 흘리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극심한 불안감에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내 발로 병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진단명이 나왔는데 공황장애라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공황장애가 나를 덮쳐오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점잖게 생긴 의사 선생님은 꼭 나을 수 있는 병이라며 약을 잘 먹으라고 했다. 약을 처방받고 나오면서 왜 그렇게 눈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세례만 받고 잘 가지도 않았던 성당에 가서, 평생 그처럼 진지하게 기도를 한 적도 없었다. 하느님 제 병을 낫게 해주세요. 이 병만 낫게 해주시면 어떤 고통이나 시련이 와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약을 먹으니 차츰 극심한 공포증은 느끼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내 생활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상태였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부모님이 어느 날 넌지시 말을 건네셨다.

“간호학원에 다녀 볼 생각은 없냐?”

 나는 생뚱맞은 제안에 어리둥절했다. ‘간호학원이라면 고졸이라면 응시할 수 있는 간호조무사 양성기관을 말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이걸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과 ‘그래도 내가 대학까지 나왔는데 이걸 한단 말이야?’ 라는 못된 자존심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곧 마흔을 앞둔 미혼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 결국 23년차 간호사였던 친언니에게 은근슬쩍 간호조무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언니, 내가 병원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마치 신탁을 받으러 간 사람처럼 애절하게 언니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바라며 대답을 기다렸다.

“응 넌 못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아니? 넌 못해.”

간단한 언니의 대답에 “응, 알았어. 내가 그렇지 뭐”라고 말꼬리를 흐렸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속 한가운데에 뭔가 부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바로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발끈하면서 분노감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내가 허당끼가 충만한데다 뭘 해도 “에구, 네가 잘 하는 게 뭐가 있니.”라는 말만 듣고 살았던 것도 사실이다. 집안일이든 바깥일이든 뭐 하나 야무지게 해내는 것이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가족의 말로 다시 한번 확인 사살을 당하고 나니 나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겁도 나고 이거 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 갈팡질팡했지만 그래도 뭔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용기를 내어 결심을 했다.

“네, 엄마 아빠 저 간호학원 한번 다녀볼게요. 대신 제가 돈이 없으니 부모님이 학원비를 좀 대주셔야 해요. 부탁드려요  ”

 부모님은 작은딸이 뭔가를 해 본다는 말에 무조건 기뻐하셨다. 약간은 떨떠름한 기분이었지만  간호학원도 찾아가 상담해 보고 여러 가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공황장애 약을 복용하고 있는 점이었다. 

상담을 하면서 간호학원 원장님은 또렷한 말로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그 약 1년 후에도 복용하실 건가요?, 극복하실 수 있죠? 평생 복용하실 건 아니잖아요. 필기시험 볼 때까지 1년이 남았는데 어때요. 그때까지 우리 극복해 봅시다.”

나는 그 말에 용기를 얻었다. ‘그래. 나도 공부하고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일을 배우면서 몸을 움직이면 이 불안증도 사라질거야. 다 내 마음 먹기에 달린 거야! 내가 아파봤으니 더욱더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현재 요양병원에서 씩씩하게 실습을 하고 있는데 넉 달 반의 실습이 거의 끝나간다. 그리고 병원 선생님들께서는 나더러 정말 열심히 꼼꼼하게 한다고, 정말 우직하고 성실하게 실습일을 한다고 칭찬해 주신다. 무기력했던 1년 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진심으로 잘하고 싶었다. 절박하게 나도 뭔가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실습병원에서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고, 혹은 병원 선생님들의 일을 도우면서 부지런히 시간을 채워나갔다. 그런 칭찬을 받으면서 하나씩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있다. 기쁘게도 지금은 공황장애 약을 먹고 있지 않다. 한없이 힘없고 우울했던 과거의 나를 떨쳐 이겨낸 것이다.

 앞으로 9월에 있을 자격증 시험도 합격하고, 병원으로 취업해서 간호조무사로서 활기차게 살아갈 것이다. 몸과 마음이 아프신 분들을 위해 사명감을 갖고, 나는 계속해서 시도하고 도전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받은 희망이 남기고 간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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