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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하 Aug 17. 2022

상실과 언어의 여로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2021), 지나친 진실의 창구를 직시하는 순간



하마구치 류스케의 시간

 고르차코프가 도메니코의 촛불을 들고 온천장을 가로질러 정의의 불을 지피는 장면은 자그마치 10분 가까이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진다. 타르코프스키는 <노스탤지아>(1983)를 통해 그의 작품이 으레 그래 왔듯이 축약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몇몇의 장면들을 제시한다. 구원의 모티프를 관통하기 위해 필요한 물리적 시간은 스크린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는 때때로 경험적 시간이 영화적 시간과 일치할수록 본질에 가까워진다고 믿는 자다. 다시 말해 특정한 영화적 순간들은 오직 '봉인'되어야만 그 가치를 구현해낼 수 있다.

 이러한 관념에 찬성표를 던지는 21세기의 젊은 시네아스트가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328분에 달하는 <해피 아워>(2015)는 영화적 시간이 곧 경험 자체가 된다. 이는 비단 영화의 긴 러닝타임 때문만이 아니다. 워크숍 장면에서 네 명의 친구들을 비롯한 관객의 시간은 온통 무게 중심을 찾아 헤매기에 바쁘다. 여기에 물리적인 시간이 길게 소요되는 것은 딱히 중요치 않다. 기나긴 워크숍이 끝나고 이후에 이어지는 영화의 정체성은 오직 이 기묘한 강의를 수강한 자만이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우연과 상상>(2021)과 함께 새롭게 선보인 작품 <드라이브 마이 카>(2021)는 앞서 제시한 전작의 특성과 부분적으로 일맥상통한다. 40여분 가량의 오프닝 시퀀스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관객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감독이 실제로도 사용한다는 방식의 대본 리딩 장면들은 어쩌면 영화가 찾아내고자 하는 본질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실질적으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바냐 아저씨>의 길게 이어지는 결말부는 여태껏 달려온 영화의 모태를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이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단순히 가공된 시간이 아니다. 영화가 도달하려는 어떤 이들의 삶에 의해 '봉인된 시간’이다.


상실과 저주

 가후쿠는 비행기가 결항한 탓에 일찍 돌아오게 된 자신의 집에서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다. 일주일 후 교통사고로 인해 찾은 병원에서 녹내장 판정을 받는다. 의도적으로 늦게 귀가한 날에는 아내의 죽음을 뒤늦게 발견한다. 영화는 이 모든 사건으로부터 2년 후 히로시마의 예술문화극장을 달리는 길 위에서 오프닝 시퀀스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상실을 외면한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후에도 그녀에게 질책은커녕 알아챈 티조차 내지 않는다. 그녀와의 정사 중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부감으로 내려보자 무력감에 짓눌렸는지 두 눈을 팔로 가려버린다. 주차를 기다리는 도중에 넣은 안약은 가후쿠의 나오지 않았던, 하지만 나와야만 했을 눈물을 대변한다. 다만 그가 외면한 채 실감하지 못했던 상실의 무게는 증발하지 않았다. 살아가는 지금의 시공간에 고스란히 그 고통을 실어 나른다. 이 점은 이상하다. 시간이 저물고 지나간 과거의 순간들은 왜 지금을 살아가는, 현재로도 너무 벅찬 인간을 이토록 무참히도 짓누른단 말인가.

 그는 외도의 현장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빠져나가듯이 때때로 진실의 순간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는 운이 좋다기보다는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소파 위 그녀와의 마지막 성관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팔 하나 정도의 얇은 두께로 두 눈으로 마주쳐야 했을 진실을 외면한 잘못에 대한, 녹내장으로 좁아지는 시야를 막기 위해 넣은 안약으로 겸사겸사 슬픔을 모방한 잘못에 대한 저주. 그의 지난한 상실들은 2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히로시마를 향해 달리는 빨간 차에 동승한다.


언어와 역할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통하지 않는 언어로 대화하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하루키의 원작보다도 더 깊은 체언처럼 느껴지는 체홉의 <바냐 아저씨>에는 가후쿠의 재구성으로 인해 갖가지 언어가 가득하다. 배우들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의미적 소통이란 없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상대의 호흡 위로 자신의 언어를 입히는 작업을 통해 하나의 연극을 완성한다. 이 예술은 아마 지구 상의 어떤 언어가 틈입해도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반복 훈련을 통해 인고의 시간을 거쳐 진실함을 마주하기 위한 감정의 정제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역설적이게도 이 독특한(지독한) 훈련 방식을 적용시킨 자가 자신의 진실한 슬픔을 계속해서 외면해왔던 가후쿠라는 것이다. 이 역설을 사용해 영화는 바퀴를 굴린다. 진실한 감정의 언어를 확인하지 못한 그는 자신이 만든 세계인 연극 속으로조차 들어가지 못한다. 바냐 역으로 자신의 아내와 외도한 타카츠키를 세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는 생의 상실을 자각하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바냐를 임시로 연기해줄 불분명한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인물은 그를 대신해 아내가 남긴 이야기의 마지막 조각을 맞춘다. 그리고는 곧장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퇴장한다.

 이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는 역할의 치환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 미사키의 소개로 감상한 쓰레기의 추락은 소복한 함박눈으로 묘사된다. 야외 리허설에서 펼쳐진 나무 앞 진실한 감정의 발현은 사실 배우들의 연기일 뿐이다. 결말부 미사키는 가후쿠의 차와 유나, 윤수 부부의 개를 데리고 있다. 서로의 삶을 관통한 슬픔의 치유는 언어의 의미적 소통이 아닌 순간의 감정적 교류였다. 순식간에 처리하는 치유는 어쩌면 인공눈물과 같은 ‘척’일 수 있다. 어느 순간에 다다라서야 마주하는 과거의 슬픔은 이처럼 뜻하지 않은 역할의 치환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로 시작해 직접 연기했던 연극을 언어의 혼합으로 감독한 <바냐 아저씨>. 가후쿠의 마지막 모습은 또다시 바냐의 모습을 한 채 소냐의 무형적 대사를 거쳐 서서히 사그라지는 삶의 연속 속으로 암전 된다. 아내 오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빨간 차는 더 이상 그를 위해 굴러갈 필요가 없다. 그는 삶의 연속 속에서 천천히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쉬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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