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7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열네 번째 날1-
길가에 늘어선 오렌지 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주황색 열매가 햇빛에 반짝인다.
오늘은 봄볕이 좋다.
“같이 앉아도 돼요?”
진한 커피 한잔으로 조용히 마음을 추스르려는데 젊은 여자 하나가 우뚝 다가와 선다.
네이비색 바탕의 흰 꽃무늬 블라우스와 베이지 톤의 주름진 스커트가 꾸미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어느 틈에 마주 앉은 여자가 수줍은 듯 넓적한 팬에 담긴 빠에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더니 금세 밝은 목소리로 냄비째 나올 줄 몰랐다며 같이 나눠 먹자고 혼자 깔깔 웃는다.
열린 창문으로 상큼한 오렌지향이 보드라운 바람에 실려 와 이마를 간질인다.
오늘은 산뜻한 날이다.
-열네 번째 날2-
낯선 여자와, 그것도 단둘이 밥을 먹는 게 아무래도 어색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숟가락질만 하고 있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다.
적당히 둘러대고 일어나야겠단 생각에 힐끔 그녀를 건너다보지만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되레 붙들리고 만다.
“스페인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녀가 빠에야를 한입 가득 넣고는 천연스레 오물대면서 묻는다.
여자의 당돌한 질문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아내와 정반대의 방향을 선택했다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나는 어깨에 엇메고 있는 카메라를 식탁 위에 놓고는 사진 때문이라고 대답을 얼버무린다.
여자가 “이거 봐도 되나요?”하더니 말려 볼 틈도 없이 냉큼 카메라를 움켜쥔다.
“그쪽이, 그러니까 아가씨 마음대로 그러면.”
마땅히 부를 만한 호칭이 없어 그녀를 제지하려다 그만 물러선다.
“혜인이에요. 윤혜인.”
나는 카메라 액정 화면에 눈을 박고 있는 혜인이를 멀뚱히 바라만 본다.
-열다섯 번째 날1-
지독한 우울의 마법,
내 사진에 관한 혜인의 진단이었다.
그리고 바로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처방해 주었다.
우리는 지금 세비아의 오렌지 정원을 거닐고 있다.
옛날 옛적 깊은 슬픔의 불치병에 걸린 왕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세 개의 오렌지를 얻기 위해 모험을 떠나 마침내 그 중 한 오렌지에서 나온 니네타의 사랑으로 다시 기쁨을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니네타는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이의 저주에 걸려 나를 잊으려 한다.
아내는 클로토가 자아 만든 운명의 실타래에 묶인 채로 라케시스가 정해 준 길로 떠났다.
그리고 예리한 가위를 든 아트로포스가 아내의 운명에서 나를 갈라놓으려고 길목을 지키고 있다.
아내는 운명을 믿느냐고 물었다.
더 이상 기쁨은 없다.
그것이 내 대답일 수 있다.
-열다섯 번째 날2-
오늘도 우리는 서쪽으로 전진했다.
산타마리아호가 가리키는 항로는 단순했으나 그렇기에 하얀 오렌지 꽃이 사랑을 속삭이는 세비아로 돌아오는 여정은 너무나 무모했다.
그것은 콜럼버스의 운명이었다.
이 길은 이제는 내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 되어버렸다.
나는 카레카레 해변의 지구반대쪽을 향해 서쪽 바다를 건너왔다.
그리고 한 줌의 재가 되어 영원한 고요 속에 잠든 그 옛날의 항해자를 마주하고 서 있다.
“왜 산타와 루돌프라고 하지 않고 산타 마리아라고 이름을 지었을까요?”
혜인의 생뚱한 한 마디에 그만 웃음이 터진다.
콜럼버스도 껄껄 웃는다.
그러다가 울음을 깨문다.
산타와 마리아의 만남이 그렇듯이 우리의 숙명도 터무니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