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24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마흔여덟 번째 날-
아내는 일기장에 작별인사를 남겨두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 남은 페이지마다,
“까만 화장 계집애, 이름을 뜯어 먹는 흡혈귀” 라는 알 수 없는 글자만 깨알같이 적어 놓았다.
반듯했던 글씨체도 뒤엉킨 실타래처럼 흘려 써서 마침내 문자의 형태조차 잃어버렸다.
일기장의 몇몇 갈피는 까만 화장을 한 계집애의 손톱에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하나같이 “빨간 모자 쓴 맨발”이라고 적힌 페이지였다.
까만 화장의 계집애는 빨간 모자가 싫었던 것일 테지.
나는 여기서 아내의 일기를 더는 해독하지 않았다.
그럴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아내와 내가 강제 송환 절차를 밟느라 작성해야 할 서류가 너무 많았다.
내일이면 마드리드를 떠난다.
-마흔아홉 번째 날-
하얀 아침이 밝는다.
활주로가 훤히 들어오는 창 너머로 햇살을 받은 비행기들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아내는 푸른 파도가 찰랑대며 햇빛을 반사하는 카레카레 비치에 가고 싶어 했다.
동화 속 이야기처럼 오렌지 나무 아래를 걷던 날,
나이 들어 삶이 아련하거든,
석양이 지는 오클랜드의 검은 모래사장에 앉아 꿈속 같은 추억을 따다 밤하늘 가득 별을 수놓자고 다짐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곳과는 지구 반대쪽,
다시 돌아온 오렌지 나무 아래 추억이 잊힌 아내와 차갑게 사위어 가는 별의 주검을 바라만 본다.
구급차용 들것에 묶인 까만 화장의 계집애가 악을 쓰고 버둥대며 출국장을 빠져나간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동화 속 이야기도 없고 꿈 속 같은 별도 없는 까만 하늘 아래,
아내는 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