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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수지향 Mar 17. 2021

꽃과 생

꽃이 싫었었다

한때 꽃꽂이도 배워가며 열심이었던 나는 어느 날부턴가 꽃이 너무너무 싫어졌다

이쁘게 꽂아둔 꽃이 시든 후 쓰레기통에 넣으며 느낀 희한한 느낌 때문이었다

오늘은 이 꽃들에 물을 갈아주며 보니 그 느낌이 조금 나아진 듯이 미지근했다

갑자기 다시 꽃을 받아들이게 되었나?

이상하다 싶어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그 밑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목동으로 전학 간 후 할머니를 거의 못 뵙고 살았다

공부하는 것 외의 일은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으니 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조차 내 삶엔 없었다

대학교 다닐 때 일주일 정도 할머니 댁에서 다닌 적이 있는데 그땐 집에 반항하느라 그랬던 거였으니 할머니와 제대로 다시 관계를 맺지 못했었다

그러고 삶은 계속 흘러 작년에 겨우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할머니를 찾아뵙기 시작했다

무려 16년 만에...!

세월이 야속하게 할머니는 많이 늙어 계셨다

속상했다

하루하루를 충실하고 풍성하게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의연하셨다

그 모습을 보니 생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젊음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생의 끄트머리에서도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구나

그리고 그 어느 순간에서도 흔들림 없는 내면을 유지할 때 사람은 빛을 발하는구나


정점: 맨 꼭대기가 되는 곳


내가 주목하던 곳은 정점이었다

하향곡선을 그릴 때는 관심도 사라지고 열정도 사라지곤 했었다

그래서 꽃도 가장 아름다울 땐 좋아라 했지만 최후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을 때는 그 마르거나 썩은 줄기들을 정리하여 버리는 행위 조차 귀찮고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를 다시 만나며 늙어감에 대하여 태도가 달라진 것 같다


꺼져가는 생명도 생명인 것을

쓰레기통 속에서도 꽃은 스스로를 버린 것이 아님을

그저 담담히 자신의 생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임을

그리고 그런 꽃의 모습은

가야 할 때를 아는 분분한 낙화처럼

참으로 아름다운 것 아닌가


초등학교 2학년 때에서 멈춰있던 나의 생각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같다

꽃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게 된 것도 반갑고

무엇보다 할머니와 다시 연결된 내가 참으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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