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미리기 ep2
노예병을 아십니까?
초중고 학생 시절을 돌아보면 방학에 제대로 못 쉬는 열정적이고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방학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됐다. ‘이제 뭐 해 먹고 사나’라는 현실에 겁먹은 20살 성인이 되어서 공모전, 대외활동 같은 것에 목숨 걸고 뛰어들었다. 얌전히 학교 다니면서 학점만 잘 딴다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괴롭혔다. 당연히 흔히들 하는 휴학도 절대 하지 않았고,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부터 모든 방학을 인턴 활동하는 데에만 썼다. 취업시장에 뛰어드는 게 무서웠던 나머지 대학생활을 즐기기보다는 스펙 쌓는 데에만 급급했다.
누가 밀어붙인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를 쉬지 못하게 만들었던 아이는 세 번의 인턴 생활을 거쳐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기자가 됐다. 하지만 약 1년 7개월을 일하고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고, 대학생 때부터 쉴 틈 없이 달려온 만큼 환승 이직하지 않고 일단 쉬겠다고 선언했다. 분명 그만둘 때까지만 해도 꽤 오래 쉬겠다고 다짐했지만 매일매일 구직 사이트에 들락날락거렸다.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으니 쉬면서도 마음이 불안하고, 일하면서 받았던 스트레스보다 쉬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또 제대로 쉬긴커녕 3개월 만에 이직을 해버렸다.
이렇게 쫓기듯 3개월 만에 이직했지만, 또다시 약 1년 6개월 후 다섯 번째 회사를 그만뒀다. 이번에도 나의 다짐은 ‘이제 진짜 오래 쉴 거야!’였지만 2개월 만에 여섯 번째 회사로 이직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안 하고 쉬겠다는 내 말을 믿는 지인은 아무도 없다.
노예병 치료법이 있나요?
이렇게 쉬면 불안하고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성향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 있다. 바로 ‘노예’다. 유튜브 ‘오늘의 주우재’에서 주우재와 김이나 역시 ‘노예병’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두 사람은 노예병에 대해 쉬는 법을 모르겠고, 쉬는 시간이 아깝고, 쉴 때 쫓기는 마음이 드는,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쩔 줄 모르는 병이라고 설명했다. 노예병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이를 해결하려면 늘어져서 쉬는 것보다 활동을 하는 쉼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초중고 때는 대학교, 대학생 때는 취업이라는 목표만 바라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 이 모든 레이스의 종착지인 회사를 관뒀더니 참 공허했다. 회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면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 같지만 돌아갈 곳이 있을 때 쉬는 것과 돌아갈 곳이 없는 채로 쉬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연차 내고 쉴 때 주말에 쉴 때와는 다른 마음 가짐이 되는 것이다. 쉬는 것도 훈련이 필요할 만큼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참 답이 없다.
노예병 걸린 주제에 지쳐나가 떨어지는 건 또 제일 잘해서, 최대한 일과 삶을 분리하고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 보려고 한다. 회사를 그만둘 때도 무작정 그만두기보다 환승이직을 해야만 스스로를 덜 괴롭히지 않을까 싶다. 노예병 성향의 사람들은 프리랜서보다 월급쟁이로 사는 것이 평화로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