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이었다. 다실의 전면 창을 열자,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한량없는 여유가 생긴 밤이었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는 완벽히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자연의 한가운데는 아니지만 관념적으로는 충분히 그렇다고 느낄만한 장소이다. 몸을 휘감고 돌아나가는 바람. 몸이 움츠러들지도 이마를 쓸어 넘기지 않아도 되는, 최적으로 선선하고 가벼운 바람이 부는 가을밤은 하루가 아쉽다.
아닌 밤중 시선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른다. 녀석은 문 간 휴지통 위에 앉아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들과 그가 볼 수 있는 것들이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이 미친 순간,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여치베짱이의 눈은 또렷하고 생생했다. 우리는 마주 앉아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니, 어디서 왔니.
열린 창 쪽으로 고갯짓을 했지만 소용이 없다. 애초에 사람을 경계하는 개념이 없는 이 손님은 나갈 생각이 전혀 없다. 난감해졌다. 내게는 자유의 장소인 다실이 날개 달린 뭇 벌레들에게는 종종 난해한 공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육면체 공간의 한 면 전체를 여는 것은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즐기기 위한 차경(借景)의 구조다. 하지만 어떤 존재들에게는 물고기들의 진행방향에 놓인 고기잡이 어망처럼, 일단 들어오면 나가기 어려운 매우 위험한 환경이 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어느 곳도 나처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차나 마실 여유만만한 장소가 아니다. 그들은 열렬하게 자연을 지각하고 탐색하고 움직이며 먹이를 찾거나 번식을 하는, 프로그래밍된 제 할 일을 한다. 그들이 움직이는 원동력은 내가 보고, 듣고, 만지며 지각하는 세계에서 내가 갖는 움직임의 동기와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보통 그들은 주변을 바쁘게 살피고 별게 없음을 확인하고, 또 바쁘게 방황하다가 운 좋게 나가는 방향을 찾아 되돌아나간다. 헤매고 있으면 내가 길을 인도해주기도 하고 기다려도 준다. 문제는 우리 둘 다 때를 놓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며칠 만에 돌아온 자리에 살 길을 찾지 못하고 죽어버린 존재들을 마주칠 때, 자기중심적인 공간의 주인으로써 죄책감이 든다.
차가 더 이상 우러나지 않았고, 이번에는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종이 한 장을 꺼내 녀석의 발밑에 슬쩍 끼워 넣고 들어 올렸다. 여치베짱이는 종이 위에서도, 내려준 풀밭 위에서도 처음 본 대로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틀 후 다실에 돌아왔을 때 녀석은 문 안에서 죽어있었다. 문을 접어 닫는 사이 다시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또다시 때를 놓쳤고, 다시금 미안했다. 그날부터 창을 활짝 열 수가 없었다. 가을밤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창을 열지 않자, 곧 바깥에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푸른 것들은 종적을 감추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겨울밤에, 밤손님의 또렷한 눈이 떠오른다. 드는 것들의 나는 자리를 지켜봐야 하는 이 공간의 주인이라서 슬프다. 내가 살기 위한 자리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됨을 알아가는 일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