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이 Nov 01. 2021

사람의 향기



차의 향기는 천 리를 가고,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 茶香千里, 人香萬里



가을, 가을이라고 읊조리기만 해도 아름다운 날. 보이는 것들에는 부족함이 없건만, 성성한 가을은 청명한 나머지 뒤에 남기는 향이 없다. 밟혀서 스러지는 낙엽들의 냄새가 더해지기 전까지는 너무나 깨끗해서 쓸쓸하다. 스산한 날보다 맑은 날에 눈물이 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가족 외에는 이진법으로 화면에 투영되는 형상과 소리로만 사람을 대할  있는 . 만나서 하는  못지않게 가을에 대해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는 더욱 쓸쓸해진다. 사람들의 향기가 그립다. 향기는 이진법으로 구현해낼  없는 자극이다. 그리운 향기들을 찾으려 다실을 둘러본다. 여기에 자리한 것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놓이지 않았다.



다관, 호승, 숙우, 찻잔, 차탁... 하나씩 꺼내  찻자리를 완성하는 것은 그것들을 만든 사람을 그 자리에 초대하는 것이다. 나는 차를 혼자 즐겨마시지만 따지고 보면 진정으로 차를 혼자 마신 적은 없다. 다구 하나에 하나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그것을 만든 사람의 향기가 스며있으니.



오늘 꺼낸 다관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직접 골라왔다. 지하실의 작은 방에서는 흙과 물과 차의 냄새에, 그것들을 부리는 주인의 향기까지 얽혀 들어 취기가 오르는 느낌이었다. 작업실의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빛이 들지 않는 지하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몸을 묻고 있던 이 다관을 집어 들었다. 빚고 깎은 맛이 잘 드러나는 다관의 생김새가 좋았다. 이유 없이 마음의 눈에 띄는 기물이 있다. 작가는 수줍은 듯, 손으로 슥슥 제 자식을 쓸어내렸다. 기물은 그들의 조물주를 꼭 닮았다.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했다. 차 향보다 진한 사람의 향기가 베인 차도구를 만지다 보면,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날의 외로움이 가신다.





이전 16화 하심下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