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배기는 허언이 없는 법이다. 온다면 오고, 간다면 간다. 이런 사람에게는 나도 허투루 말하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황에 떠밀려, 혹은 마음부터 앞서 나가면 조금만 지나도 온전한 마음으로 내가 뱉은 말을 책임질 수가 없다. 시간과 마음 두 박자가 모두 맞을 때 정중하게 초대를 건넨다. 느리게 쌓은 인연은 뜨겁지는 않아도 따뜻하게 오래갈 수 있다.
나를 길들이고, 내가 길들일 존재와 함께 할 하루는 설렌다.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아직 시간이 한참 남은 시계를 쳐다보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날씨를 고려해서 차를 고르고, 그동안 쌓은 상대에 대한 정보를 통해 내어놓을 다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우의 말처럼 ‘다른 날과, 그 외의 시간들과 다른’ 오늘을 만들 마음가짐을 준비한다. 순발력이 떨어지는 나는 미리 정해두는 날과 시간 안에서 적절한 편안함과 설렘을 느낀다.
우리가 두 번째 만나던 날, 손님은 나를 닮았다며 샛노란 해바라기 꽃다발을 건넸다. 꽃 선물은 받아봤지만 이렇게는 처음이었다. 이 전까지 관심에 없던 해바라기를 찬찬히 뜯어본다. 생각보다 예쁘네. 내가 꽃 같단 말이지.. 나는 앞으로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해바라기를 거울로 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떠올리겠지. 나를 닮았다고는 하지만 사실 길쭉길쭉 뻗은 큰 키의 해바라기는 오히려 그녀를 닮았다. 매년 8, 9월 길가의 해바라기는 우리가 설렘을 간직한 채 서로를 탐색하던 시기를 연상시킬 것이다.
약속 시간이 10분 여 남짓 남으면 귀는 이미 주차장에 가닿아있다. 마음으로만 따지면 버선발로 뛰어나갈 기세다. 우리는 전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마주 앉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단 둘이 앉아 마시는 차는 시공간을 왜곡하는 마법을 부린다. 찰나의 순간이 슬로 모션처럼 쪼개지기도 하고, 몇 시간이 눈 깜짝할 새처럼 지나가버린다. 생각이 공명하면 3평 방 안에서 다른 나라를 함께 여행할 수도 있고, 내면 깊숙한 곳, 영감의 샘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솔직하지만 선을 지키는 대화들이 뜨끈한 찻물에 녹아 몸으로 흘러 흘러 ‘이해’라는 이름으로 스며든다. 여우의 말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여우의 한 마디.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어버렸어. 하지만 넌 그걸 잊으면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넌 언제나 책임이 있어.
_<어린 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