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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Jan 03. 2022

장래희망



아이는 경찰 놀이를 참 좋아한다. 숨을 헐떡이며 도둑을 쫓고 잡는 놀이를 보다 보면 우리 아이가 정의감이 특출난 건가 싶어서 묻는다. 하윤아, 커서 경찰 되고 싶어? 아이는 생각도 안 하고 아니, 한다. 그럼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엄마는 궁금하다. 없어. 단호하게 말한다. 없다고? 그럼 나는 포기하지 않고 갖은 직업을 나열한다. 너 소방차 좋아하잖아, 소방관 아저씨는 어때? 병원놀이 좋아하니까 의사는? 모두 아니.라고만 한다. 그럼 뭔데?


“나는 엄마 아빠랑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은 게, 되고 싶은 거야.”






공식 기록인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나의 장래희망은 공연의상 디자이너였다. 종종 심리학자, 역사학자와 같은 직업들이 쓰이곤 했지만, 줄곧 엄마가 내가 만든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라가는 꿈을 꿨다. 그 꿈을 대학교 때 이루었다. 학교와 병행해서 다른 공연의 의상도 여럿 도맡았다. 장래희망을 이른 나이에 이뤘는데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무했다. 이후에 재설정한 ‘장래희망’들도 하나씩 이뤄나갔다. 아름다운 꽃도 활짝 피고 나면 시들고 마는 것처럼 모든 ‘장래희망’들은 이루고 나니 빛이 바랬다. 왜일까? 인생은 다 이런 걸까?



아이와의 우문현답을 통해 나는 질문을 잘못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장래희망’을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접근을 하는 것부터 이 방황이 시작되었다. 하나의 목표를 핏빛같이 선명하게 심상화 한 것을 비전이라고 말한다. 나의 비전은 선명했지만, 멋진 옷을 입고 우아한 손짓으로 핀과 바늘을 들고 옷을 만지는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비전의 밑바탕에 사명과 가치에 대한 고심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걸 오래도록 모르고 살았다. 사실 이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한 발 더 나아가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의 결말처럼, ‘궁극’의 꿈이란 결국 평범하고 안전한 일상인 것을. 비전이니 사명이니 다 건너뛰고 아이는 직관적으로 핵심을 알고 있다. 경찰 놀이를 좋아한다고 경찰을, 소방차 좀 좋아한다고 소방관을 장래희망으로 비약했던 나는 얼마나 유치한 사람인가.



장래희망은 내가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할지에 대한 대답이며, 그 태도로 이루고 싶은 삶의 지향점이다. 그릇이 작은 엄마는 오늘도 아이에게서 배운다. 아이는 ‘시간에 도전한다.’는 세상 누구도 이루지 못한 원대한 장래희망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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