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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Aug 30. 2021

읽어줄 '삶'을 위해

짧은 사명서



7日






태어난 이래, 전 세계에 이렇게 죽음의 그늘이 지었던 적이 있던가. 국가, 인종, 종교를 막론하고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성능의 마스크를 쓰는 것뿐. 곳곳에 팽배한 무력감이 사람들을 괴롭힌다.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 _ 김훈 <칼의 노래>



뉴스에서 들리는 바이러스는 베어지지 않는 허깨비 같았다. 하지만 죽음은 분명한 것이었다. 선명했다. 아는 사람도 허깨비가 휘두르는 방망이를 피하지 못했다. 어릴 적 나에게 ‘eunice’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줬던 미국인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의 부고는 이메일보다 뉴스로 먼저 접했다. ‘진짜’ 죽음이 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허깨비가 주는 무력감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한 죽음을 위해 삶을 서서히, 촘촘하게 모아보기로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기상 시간을 앞당겼다. 일어나 제일 먼저 창문을 열고 숨을 들이키며 계절을 감지한다. 평소보다 잘 먹고, 운동하고, 웃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삶의 의지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삶을 잘 살아내더라도 언젠가 죽으면 남는 것을 생각했다. 남는 것? 상실을 목도한 사람의 필터에 의해 나는 각색될 것이다. 주관적인 추억과 인상으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글을 써야 했다. 내 사유와 질서. 분명한 죽음처럼 나의 삶도 분명하게 남기고 싶다. 나 자체로 조금 더 이해를 받도록.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어줄 것인가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는 다만 한 사람을 생각하며 글을 쓴다. 나의 아이. 집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는 언젠가 집을 짓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 어른이 된 아이를 상상한다. 나보다는 시행착오 없이 쉽게, 즐겁게 집을 짓고 가꾸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개인적인 에피소드는 차갑기도, 뜨겁기도 했던 나의 면면을 공감해주기를 바라면서 쓴다. 아이가 나중에 활자들을 조립해서 나를 입체적인 사람으로 그려줬으면 좋겠다. 언젠가 마침표를 찍었을 때, 읽을수록 이롭고 공감이 되는 두툼한 한 권의 유언이 되기를 바라면서 기록한다.



대충 읽히지 않기 위해 대충 쓰지 않을 것이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조사를 적어낼 것이다. 읽어줄 '삶'을 위해서 내가 아는 크고 작은 진실을 담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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