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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08. 2021

아빠 차의 뒷좌석



14日






아이는 혼자만 뒷좌석에 앉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빠와 엄마가 앞좌석에 앉은 게 샘이 나나보다. 앞에서 우리 둘이 이야기라도 하면 앞좌석을 두들기며 ‘조용히 좀 해줄래?’ 라며 말을 막는다.



요즘은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는 것이 당연해졌지만, 어릴 적만 해도 내 자리는 뒷좌석 가운데, 바닥이 볼록 올라온 자리였다. 안전벨트는 커녕 앞좌석 헤드레스트를 두 팔로 꽉 잡고, 몸은 반쯤 앞좌석으로 튀어나와서 엄마 아빠 대화에 미주알고주알 참견했던 게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한 행동이지만, 자동차 앞창 유리를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물어볼 수도 있어서 나는 부모님과의 드라이브를 참 좋아했었다.



바깥 풍경이 시시해지거나 차가 달리는 속도가 올라가면 뒷좌석에 다리를 펴고 누웠다. 아빠의 차가 바뀔 때마다 눕는 자세도 재빠르게 적응했다. 어떤 차는 가운데 좌석이 딱딱하거나 볼록 튀어나와서 등이 활처럼 휘었다. 그럴 땐 능숙하게 양쪽 좌석에 옷가지를 깔아 높이를 맞추고 누웠다. 아빠가 생각하는 좋은 차의 기준은 잘 모르지만, 나는 누워서 느끼는 승차감과 시트의 감촉으로 차를 평가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로 이사를 갔다. 그렇지만 부모님은 나를 생각해서 전학을 시키지 않고 매일 아침 등교를 시켜주셨다. 나는 누워가면서 못다 한 잠을 자기도 하고, 서부간선도로의 교통지옥 속에서 아빠와 다른 차 욕을 하기도 했다. 아침마다 마음이 급했던 아빠가 급정거라도 하면 나는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그래도 재밌다고 깔깔 웃으면서 다시 의자 위로 기어 올라왔다. 아침잠이 많은 아빠는 딸의 지각을 막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셨다. 말로 사랑한다 표현은 잘 안 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시간에 맞춰 교문 앞에 내려주는 아빠에게서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성산대교를 건너 양화대교 방면의 강변북로에 접어들면 비로소 교통체증이 풀리고 적당한 속도로 차가 달릴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강을 끼고 달리는 도로에는 플라타너스와 수양버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이때부터는 여유만만하게 누워 가로수를 감상했다. 아빠는 그 세대 어른들이 그랬 듯, 팝송을 즐겨 들으셨다. 영어도 배우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리기 위해 오성식의 팝스 잉글리시 테이프를 거의 매일 트셨는데, 자동차가 시원하게 달릴 때쯤에 카펜터스의 ‘yesterday once more’가 흘러나오곤 했다.



날씨가 좋은 날은 햇빛을 받은 반짝이는 가로수 잎들 사이에서, 발가락에 닿는 산뜻한 바람 속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비가 오는 날은  지붕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와 앞창 유리를 바쁘게 오가는 와이퍼 소리가 노래와 어우러졌다.



“에브리 샤랄랄라~에브리 워우어어 스틸 샤인~에브리 싱어 링어 링~”



영어도 모르던 나는 들리는 대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빠는 같이 따라 부르지는 않았지만 내 노래가 시끄럽다고 말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조용히 내 노래를 듣기만 하셨다. 룸미러에 비친 아빠는 옅은 미소를 띠고 계셨다.



어제 아침 강연 시간에 아주 오랜만에 이 노래를 다시 들었다. 다리를 펴고 누우면 뒷좌석에 꼭 맞던, 작은 몸의 나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 누워서 보던 가로수들이 영상으로 지나가고 자동차 유리창에 글씨를 쓰던 발가락의 감각도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따뜻한 추억의 시점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마음이 애틋했다. 눈물을 참느라 그때처럼 노래를 따라 부르지 못했다. 어릴 적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던 영어 가사의 뜻을 이제는 아는데, 노래 가사처럼 그 시절은 돌아오지 못한다. 뒷좌석에서 보이던 아빠의 풍성하고 새카맣던 머리카락이 그립다.



When I was young I’d listen to the radio

내가 어렸을 때 라디오를 듣곤 했어요.


waiting for my favourite songs,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길 기다리면서요.


When they played I’d sing along It made me smile.

그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곤 했죠. 노래들은 나를 미소 짓게 했어요.


Those were such happy times and not so long ago

참 행복한 시절이었죠,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닌데요.


How I wondered where they’ve gone

그 시절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얼마나 궁금했는지 몰라요.


Buy they’re back again just like a long lost friend.

그런데 그 노래들이 돌아왔어요. 오랫동안 잃었던 친구처럼요.


All the songs I loved so well.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노래들이요.


It’s yesterday once more.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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