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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Oct 07. 2021

'매일 한 알'을 망각하고 싶다



42日






먹고 자고 입는 거 외에 13년 동안 매일 ‘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하루 한 알 약 먹기. 신지로이드는 갑상선 호르몬제이다. 내 남은 생 동안에는 매일 먹어야 한다. 갑상선이 1/4만 남은 상태에서 호르몬제를 먹는 건 부족한 호르몬을 채워주려는 이유도 있지만, 암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갑상선 호르몬이 줄면 갑상선 자극 호르몬이 나오게 되는데 이 호르몬이 갑상선암세포를 빨리 자라게 해서 재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몸에 부족하지 않게, 약간은 고용량으로 채워줌으로써 자극 호르몬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 약의 기전이다.



이제는 예후가 안정적이라 1년에 한 번 정도만 체크업을 하면 되는데, 그때마다 의사가 묻는 것도, 당부하는 것도 하나뿐이다. 약은 매일 제시간에 드시고 계시죠? 약 잘 챙겨 드세요. 재작년, 양성이지만 작은 종양이 다시 생겼다. 약 복용을 더욱 강조를 하는 이유이다. 이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약이 없으면 내 몸이 온전히 작동하지 못한다니 슬픈 일이다.



진짜 이 쪼만한 게 나를 좌지우지한다고? 여전히 약이 몸에 도움이 되는지 와닿지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운동화를 신기 전에서야 양말 신는 걸 깜빡한 걸 아는 정도의 빈도로 약 먹는 걸 잊는다. 공복이 아니더라도 생각나면 일단 먹기도 하고,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생각이 안 나면 일단 또 먹는다. 여행지에 가방을 대충 싸갔다가 약병을 안 챙겨가는 날도 있다.



“왜 이렇게 자기 몸을 안 챙겨, 약을 좀 담아오지.”

“이 것 때문에 죽지는 않잖아. 괜찮아. 여기도 다 병원, 약국 있어. 몸 안 좋아지면 사정 이야기하고 처방받아오지 뭐.”



세상 쿨한 척하며 안일하게 살다가 1년에 그 하루, 피검사와 초음파가 있는 날이면 3일 전부터 달달 떨기 시작한다. 왠지 자주 목이 쉬는 것 같고, 목에 뭔가 만져지는 것도 같다. 그동안 약 먹는 것에 소홀해서 생겼을지 모르는, 그런 최악의 가능성에 대해서 상상한다. 자학적으로 걱정을 할 수 있을 만큼 하고 나서 결과가 괜찮으면 왠지 그렇게 걱정을 했기 때문에 괜찮은 것 같다. 차라리 이게 낫다. 방심하다 당하는 건 이제 그만 하고 싶으니까. 병원을 다녀오면 의사 선생님 말씀 약발은 일주일 정도, 이후에 또 제자리다. 미련스러우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 (쓰고 보니 정말 한심하네.)



그렇지만 나는  수만 있다면,  망각하고 싶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작은 알약을 먹어야 한다는 임을, 약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의 상태를. 요즘은 AI 기술적, 윤리적 한계에 부딪히면 의도적 망각을 선택한다고 한다. 이왕이면 나의 의도적 망각은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선물이 되길 바란다. 기억을 비워낸 자리에  의지로   있는 일들로 다시 기억을 채우고 싶다.



휴, 결국 약 먹을 시간을 알람으로 맞춰 놓는다. ‘매일 한 알’이 뭐 이렇게 어려운 거지. 무기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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