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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Oct 10. 2021

물들어

분청의 아름다움



분청사기를 좋아한다. 티 없이 맑은 백자는 가끔 너무 깨끗해서 화려하다. 완벽하게 짝을 맞춰놓지 않으면 어딘지 모르게 틀렸다는 느낌이 든다. 그에 비해 분청사기의 질박함은 편안하다. 어떤 곳에 놓아도 잘 어울린다. 쓰기에도 부담이 없다.



분청은 분장회청의 줄임말이다. 어두운 흙 위에 백토로 화장을 한다는 뜻이다. 붓으로 결을 드러내며 하얀 분칠을 하거나, 전체 혹은 일부에만 바르기도 한다. 나는 무심하게 백토 물에 덤벙 담갔다 빼는 방식을 좋아한다. 도예가는 아킬레우스의 발목을 잡고 스틱스 강에 담그는 바다의 여신 태티스가 기분을 느낄 것이다. 기물의 몸에 남아있는 도예가의 손자국을 찾아본다. 이 유일한 아킬레스건이 아름다움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것을 그도 알까.



분청은 시간을 품어가며 변화한다. 마치 술이 익어가는 것처럼 변화 속에서 활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곁에 두고 쓰는 재미가 있다. 하나의 분청 다관(차 주전자)은 하나의 차를 우리는 데에만 사용한다. 느슨한 흙의 숨구멍 사이에 차의 색과 향이 숨어들기 때문이다. ‘숨어들다’는 '스며들다'이다. 차를 우리면 우릴수록 한 가지 차의 고유한 성질이 유약의 복잡한 잔금 사이에 스며들어 차와 함께한 시간을 시각화한다.



다관의 표면에 그물 같은 찻심이 늘어난다. 이제는 낙엽처럼 물들었다. 나와 차를 매개하는 다관의 시냅스가 그만큼 확장되었다. 얽히고설켜있다. 이 다관으로는 대만의 ‘동방미인’이라는 차만 우린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이 차를 마시고 동방의 미인 같다고 별명을 붙여줬다고 하는데 이름답게 그윽한 수색과 향을 가지고 있다. 찻물이 담겨있지 않아도, 코에 대면 특유의 과일향과 단향이 올라온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물들어간다.



좋아하는 차의 색과 향을 품어가는 다관을 지켜보며 또 한 번의 가을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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