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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Oct 20. 2021

낮잠 좀 잡니다만



점심을 먹고 다시 컴퓨터 앞이다. 찻장을 연다. 오늘은 부드러운 황차를 우려 볼까. 유리 주전자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바글바글 끓는 물이 반짝거린다. 물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이 넘실넘실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최면에 걸린 듯 잠이 쏟아진다. 가을볕은 봄볕 못지않게 위험하다.



나는 잠이 많은 편이라 부모님이 걱정이 크셨다. 하교를 하면 일단 한숨 잤다. 시험기간에 시험을 보고 오면 다음 과목 벼락치기라도 해야 하는데 일단 잤다. 차에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들고, 밤새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다행히 부모님께 걱정만큼 실망을 안겨드리지는 않았다. 낮에 자면 밤에 못 잔다고? 천만에. 차를 마시면 잠이 안 오지 않냐고? 천만에. 매우 잘 잔다. 남들에게 자랑스레 말은 못 해도, 시간이 허락할 때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사랑한다.



낮잠의 놀라운 효과로 본다면 사실 자랑스레 말 못 할 것도 아니다. 종종 한낮의 꿈속에서 고민하던 답을 찾는다. 논문의 전개를 풀어내느라 며칠을 기숙사 방에서 나오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내 상황은 암담한데, 야속하게도 너무 좋은 창밖 날씨를 보기가 싫어서 암막커튼까지 치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냈었다. 그러다 지쳐 잠들었는데 꿈에서 벽에 붙여둔 포스트잇이 저절로 정렬이 되는게 아닌가.  비워두었던 칸에는 넣어야 할 단어까지 쓰여졌다. 나는 이 신비한 경험을 잊지 못한다. 내게 낮잠은 모두가 헛되다고 일컫는 백일몽이 아니라, 기회를 잡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에라 모르겠다. 쏟아지는 잠에 순종하며 토퍼를 깐다. 다실에는 토퍼와 담요가 상시 완비이다. 지금부터 30분, 낮잠을 잘 생각이다. 여전히 한낮의 쉬어감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에게 윈스턴 처칠의 말을 전한다.



낮잠을 잔다고 해서 일을 덜 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상상력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의 아둔한 생각일 뿐이다.
당신은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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