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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Nov 04. 2021

자만심을 자신감으로 착각할 때

맥주들고 넋두리



52日






무역은 국경을 넘어 일어나는 재화의 매매 활동이다. 일단 바이어가 제품에 관심을 보이고, 생산자가 오퍼를 하면서 가격, 지불 조건에 대해 치열하게 협상한다. 바이어와 생산자 양쪽에는 리스크가 존재한다. 바이어 입장에서는 생산자에게 돈을 다 보냈는데, 물건을 보내주지 않아서 돈이 떼일까 봐 걱정이고, 생산자 입장에서는 돈을 일부만 받고 물건을 다 만들었는데, 바이어가 물건을 인수하지 않고 완납을 하지 않아 손해가 날까 봐 걱정이다. 서로 간의 입장 차로 힘의 줄다리기를 하지만 무역 계약에 있어서 제일 큰 변수는 제품의 독점력과 신용이다. 꼭 돈이 많은 큰 회사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규모가 작은 공급자라고 해서 불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독보적인 기술과 시간이 쌓은 신용을 가지고 있는 쪽이 계약 조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위 두 가지를 모두 가진 회사에서 꽤 오랜 기간 무역을 해왔다. 시장에서 독보적 디자인력을 가졌고, 수십 년 간 전 세계에서 신용을 쌓아온 회사이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바이어에 대해 최선은 다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나 싶다. 업계에 오래 있다 보면 정보에 밝다. 휴민트를 통한 정보는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낼 수 없는 질적 정보가 가득하다.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홈페이지와 같은 보여지는 것들은 얼마든지 멋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인터넷이 발달할수록 이런 인적정보는 더 가치 높게 평가된다. 물론 직접 대면을 하면 더 판가름이 쉽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매년 전 세계의 박람회에 몇 차례씩 참가했다. 바이어가 부스에 들어설 때의 걸음걸이, 표정, 대화 중 제스처, 질문내용만 봐도 회사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비즈니스를 대하는 자세가 어떤지  파악할 수 있다. 기존 클라이언트에게 신규 바이어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국경 너머에 있는 나라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리스크를 상쇄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신뢰를 갖춘 생산자의 입장으로 무역 경험이 오래이다 보니, 어떤 거래이든 무조건 잘할 수 있다고 자만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자만을 자신감으로 착각했더니, 알던 것들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거나, 독이 되어 마음만 졸이게 되는 일을 벌였다. 남편이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며 필요한 장비들을 러시아에서 구매해주기로 했다. 특수 장비로 업계에서 알려진 곳이라고 하길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러시아 회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제품에 대한 독점력을 믿었고, 제품을 사용해야 하는 촬영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신용에 대한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는 상대가 생산자이고, 나는 바이어였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생산자 입장에서 지불을 분납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나는 100% 선입금을 하라는 러시아 회사의 견적서를 받고 협상도 시도하지 않은 채 덜컥 입금을 해주었다.



리드 타임 중간중간 상태를 점검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냈으나 며칠 째 답이 없었다. 주문 전에는 칼같이 오던 회신이 점차 느려졌다. 장비를 사용해야 하는 촬영 날이 다가오고 있었고, 약속한 납기일이 거의 도래하자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납기에 대한 노티스를 강력하게 보냈지만 며칠 만에 온 답장은 케파에 문제가 생겨서 늦어진다고 다음 주까지 마무리를 하겠다며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겪어보지 않은 생산자이자, 바이어의 입장이었기에 그때서야 계약에 대한 나의 미숙함에 자책했다.



음성은 기록으로 남지 않기 때문에 나는 간단한 내용이라도 꼭 이메일로 주고받는다. 답변이 늦어져서 재발송을 하는 경우에도 며칠이나 기다렸고, 몇 번이나 재촉을 했는지가 모두 남기 때문에 독촉도 반드시 이메일로 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화를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신호가 꽤 오래갔다. 그동안 코로나라서 이 회사가 망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계속 전화를 안 받으면 어떡하지, 돈 떼이면 러시아로 날아가면 해결되려나, 남편한테는 뭐라 하지. 보증보험을 들 걸 그랬나. 까지 온갖 생각이 머리를 헤집었다.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남자는 내 이메일에 코레스를 하던 그였다.



나는 완전히 불리했다. 지키지 못한 납기로 그에게 화를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돈도, 아직  만든 제품까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말투였지만 나는 불쌍한 말투로 애원했다. 미안한 처지보다  불쌍한 처지가 우선이었다. My boss is going to kill me 거짓부렁으로 외치며. 남편은 어쩔  없지, 이것도 경험이지. 어차피 돈은  보냈을 거야.라고 했지만, 나는   말도  건네고 자진해서  계약의 을이 되었다는 사실에 의기소침했다. 납기는    미뤄졌고, 시차 때문에 그들이 러시아에서 한창 일하는 , 나는 송장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보내야 한다. 오늘밤도 냉장고 문을 연다. 자만심을 자신감으로 착각하면, 오밤중에 맥주캔을 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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