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 북> 뉴스저널리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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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부터 1965년까지 미국 남부에서 시행된 짐 크로 법은 흑인과 백인을 합당하게 분리한다는 역설적인 법입니다. 영화 '그린 북'은 그 시절 발행된 흑인 여행자를 위한 여행 책자를 들고 미국 남부로 연주 여행을 떠난 흑인 피아니스트 돈 설리와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토니 발레롱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사진='그린 북' 스틸컷
'백인이 쓰는 화장실을 함께 쓸 수 없다', '백인이 이용하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백인이 묶는 호텔과 주유소와 미용실을 이용할 수 없다', '흑인은 투표할 수 없다', '백인과 흑인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 지금의 시선으로는 무척 당혹스러운 위의 항목들은 1876년부터 1965년까지 미국 남부에서 시행된 짐 크로 법의 일부입니다.
흑인과 백인을 평등하게 분리하려 한다는 역설적인 이 법은 불과 100년 전 미국 남부뿐만 아니라 전역에서 일종의 합법적 차별입니다. 당시 흑인들은 위의 언급한 조항뿐만 아니라 셀 수없이 많은 제약 속에 갇혀 살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피부색이 하얗지 않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미국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흑인 연주자가 활동하거나 백인 연주자와 함께 연주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인류의 역사 중 하나인데요. 짐 크로 법이 폐지된 지 약 80년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요. 그 시절의 차별은 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인종 차별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특히 1936년 뉴욕의 우편물 배달부로 일하던 흑인 빅토르 위고 그린이 발행한 일종의 흑인 여행 필수 가이드 북 '자동차로 여행하는 흑인을 위한 그린 북'(The Negro Motorist Green-Book)은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이 가이드 북 속에는 흑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호텔, 식당, 주유소, 미용실, 화장실, 도로 등에 대한 정보가 실렸습니다. 짐 크로 법 폐지 이후 발행이 중단되었지만, 21세기에 들어 다시 주목받은 자료입니다.
영화 '그린 북'은 '자동차로 여행하는 흑인을 위한 그린 북'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입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합법적인 차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재미있게 또 담담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피터 패럴리 감독은 1960년 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흑인 차별을 이 책과 실존했던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그가 고용했던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기사 토니 발레롱가의 이야기를 섞어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흑인 피아니스트 돈 설리 박사는 백인 연주자와 함께 피아노 트리오 공연을 했습니다. 하지만 백인과 흑인이 한 대의 자동차에 타지 못했으므로, 두 대의 자동차에 나눠탄 채 연주 여행을 다녔습니다. 사진='그린 북' 스틸컷
피부색으로 학대와 다르지 않은 차별을 오랜 세월 참아야 했던 흑인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요. 이 영화는 지난 2018년 개봉된 이후 전 세계에서 특별한 박수를 받았습니다. 제43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관객상, 제76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3관왕,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각본상, 남우조연상까지 휩쓸었습니다. 하지만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의 후손들은 이 영화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보였는데요. 돈 셜리 측은 영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고요. 토니 발레롱가 측은 분명 둘의 우정은 사실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아니라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영화라고 소개합니다.
1962년의 뉴욕은 짐 크로우 법이 만연한 도시입니다.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기 뉴욕 최고의 나이트클럽 ‘코파카바나’에서 일하던 비고 모텐슨(토니 발레롱가 역). 평화롭던 어느 날 그는나이트클럽이 몇 달간 영업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보받습니다. 생계를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흑인 피아니스트 마허샬라 알리(돈 셜리 역)의 미국 남부 투어 연주회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됩니다. 부자들만 사는 고급 저택에 살던 닥터 셜리는 성공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입니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미국 남부 지역에서 받을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고요. 이러한 이유로 돈 셜리는 비고 모텐슨에게 솔깃한 제안을 합니다. 미국 남부 연주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돕는다면 큰 보수를 하겠다고요.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은 자동차 여행길에 오릅니다. 크리스마스이브까지 다시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면서요.
예상대로 미국 남부 여행은 흑인에게 쉽지 않았습니다. 돈 셜리를 초청한 백인 부자들은 값비싼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준비하지만, 자신의 집에서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게 막고요. 호텔 레스토랑에서 연주를 하기 직전에도 같은 호텔에서 식사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흑인 전용 숙소에서만 묶어야 했고요. 여행 중 돈 셜리에게 쏟아지는 여러 비난과 조롱을 토니 발레롱가는 점점 우정으로 막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한 도시의 공연장에서 먼지와 쓰레기가 잔뜩 쌓인 그랜드 피아노로 돈 셜리가 연주해야 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는데요. 토니 발레롱가는 공연장 관계자를 협박해 계약 조건대로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가져다놓게 만듭니다.
또 연주를 마치고 다른 도시로 이동 중, 일몰 후 흑인이 차에 탔다는 이유로 지역 파출소에 수감되기도 했는데요.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상황은 실제 당시 흑인들이 고통받던 문제들이기에 더욱 더 안타까운 장면이기도 합니다. 숱한 슬픔과 어려움을 함께 해결한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이브 집으로 무사히 돌아옵니다. 미국의 성공한 흑인과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라는 경계를 허물고 속 깊은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된 채로요.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그들은 평생의 친구로 지냅니다. 피부색은 우정에 아무 문제없다는 걸 증명하면서요.
돈 설리 박사는 쇼팽, 드뷔시, 베토벤 같은 클래식 음악가들의 작품을 연주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백인 대중들은 흑인 피아니스트가 쇼팽 등의 주요 고전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돈 설리는 재즈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연주해야 했습니다. 사진='그린 북' 스틸컷
'그린 북'을 빛낸 음악 3선
프레데릭 쇼팽 연습곡, Op. 25, No. 11번 A단조 '겨울바람'
쇼팽이 1836년 작곡한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에 수록된 작품 중 하나다. ‘겨울바람’이라는 부제로도 유명하고, 24곡의 연습곡 중 가장 어려운 곡으로도 꼽힌다.
클로드 드뷔시 아라베스크 E장조 L.66 1번
1888년 드뷔시는 두 권의 '아라베스크'를 작곡했다. 음악에서 아라베스크는 하나의 악장을 화려하고 서정적으로 이끄는 형식을 뜻한다. 특히 '아라베스크 E장조 L.66 1번'은 드뷔시가 발표한 최초의 피아노 작품이기도 하다.
에릭 사티 왈츠-발레 B플랫 장조, Op.62
1885년 에릭 사티가 발표한 피아노 작품이다. 음악 수업을 함께 받았던 대학 동기인 마담 클레멘트 르 브레통에게 헌정된 곡으로, 에릭 사티만의 가볍고 로맨틱한 선율이 재치있게 흐른다.
| 정은주 (음악 칼럼니스트) '알고 보면 흥미로운 클래식 잡학사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