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공백

행성과 관성

서른다섯 번째 공백

by 은호


어릴 땐 잠이 오지 않으면 아빠를 찾았다.

아빠는 엔지니어였지만 문학을 좋아했고

때로는 심리학과 철학도 좋아했고

역사와 우주도 좋아했다.

그중에도 공상과학을 가장 좋아했다.

아빠가 들려주는 한 편의 행성들을 모아

눈을 감을 적마다 고요한 은하가 팽창하면

나는 언제나 다정한 우주 속에서 잠이 들었다.


한참 어른이 되어 이따금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관성에 이끌리듯 아빠를 떠올린다.

아빠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가끔 이 세상에 당신의 존재가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기이한 기분이 들어.

차라리 어디 먼 우주에, 아주 먼 곳에서

똑같이 시와 소설을 사랑하며

다만 건강히 지내고 있었으면 해.

어떻게 지내, 물음을 던지면

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싶거든.

당신을 품은 다정한 우주가

긴 긴 미래가 되었을 때에

내게로 당신의 이야기를 돌려주기를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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