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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Dec 07. 2021

그날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일곱 번째 공백

지난달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의 오후, 가족이 있는 톡방으로 엄마가 뜬금없이 축하 이모티콘을 보냈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짧은 생각과 함께 다시 폰을 덮으려는(일과 중이었으므로) 순간, 한 번 더 카톡이 왔다.


오늘은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 31주년~


나는 카톡을 보자마자 휴대폰 잠금을 풀고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그랬다. 매년 11월 11일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언젠가부터 저도 모르게 챙기는 것을 망설였던, 그래서 잊고 말았던 부모님의 가장 기쁜 날.

마지막으로 챙겨드린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생각하면 기억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케이크도 직접 사 와서 챙겨드렸는데. 한 번은 형제와 돈을 모아 -당시 나의 전재산과 다름없던 용돈을 전부 쏟았다- 엄마가 이따금 둘러보시던 명품 브랜드의 스카프를 선물해드린 적도 있었다. 비록 엄마는 아깝다며 딱 한 번밖에 쓰지 않으셨지만.


***


그럼에도 점점 축하하는 것을 망설이고, 챙겨드리는 것마저 잊어버리게 된 것은 두 분이 함께 기뻐야 하는 날에 엄마는 당신뿐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의 흔적을 마주하는 게 더 슬프고 힘들었다’는 엄마의 스쳐 지나간 말이 마음속에 오래 박혀버린 탓에, 더 신경이 쓰였다. 내 섣부른 축하가 괜히 엄마를 더 외롭게 해 드리는 건 아닐까 하고.

실제로 고등학생 때, 엄마의 퇴근시간에 맞춰 빵집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고구마 케이크를 사 온 날은 엄마가 뭐하러 다 먹지도 못하는데 이런 걸 사 오냐고, 이런 거 이제 안 챙겨줘도 된다며 볼멘소리를 하셨기 때문이다.

기념일의 기분이라도 내셨으면 하는 마음에, 엄마를 위해 어린 내가 뭐라도 해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들떠서 케이크를 건네던 손이 무색해졌다. 어쩌면, 그 해가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년에는 형제가 단체 톡방에 먼저 축하 메시지를 남겨서 다 같이 축하 이모티콘과 함께 가볍게 넘어갔던 것 같고.


***


그런데 올해는 엄마가 먼저 결혼기념일을 축하한 것이다. 그 순간 기념일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아차 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솔직히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곧 묘한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곧장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케이크와 음료 기프티콘을 보내드렸다. 케이크 두 조각, 음료 두 잔짜리로. 외롭게 혼자 먹지 말고 나중에 OO이모(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드시라고. 새삼스럽지만 이제 돈을 버는 입장이 되니 이 정도 선물로 퉁치는 게 조금 찔리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걸로도 퍽 기쁘셨던 모양이다. 예쁜 짓을 한다며 화답하시더니, 며칠 뒤에 OO이모와 같이 맛있게 먹었다며 고맙다고 카톡이 왔다. 어떤 케이크들로 골라서 사 왔다고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말해주셨다.

거창하고 대단한 선물도 아니었고, 기념일다운 파티를 해드린 것도 아니었지만 괜히 마음이 벅찼다. 이제는 엄마가 결혼기념일 케이크를 거절하지 않으시는 것도,  케이크를 외롭지 않게, 즐거울  있는 누군가와 함께 드실  있다는 것도.  사소한 사실 하나가 오래 머물러 있던 마음속  문장을 밀어내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이따금 힘들고, 슬프고, 그리운 날들 속에서도

우리 가족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므로.


***


내년 결혼기념일은 내가 가장 먼저 축하해드려야지. 모든 사람들이 빼빼로데이의 설렘을 느낄 때, 나는 ‘우리 부모님께 무엇을 선물해드리면 좋을까’하는 기대로 설레어했던 어린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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