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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Nov 22. 2021

아주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에 대한

여섯 번째 공백

당신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내 진로에 대해 자신이 없어질 때면 늦은 밤까지 내 이야기를 곧잘 들어주었다.

학원을 마치면 꼭 차로 나를 데리러 와주었는데, 가끔씩은 차를 가져오기보다 조금은 먼 거리를 걸어와 내 가방을 대신 메어준 채로 집까지 함께 가기도 했다.

그 길목에서 우리는 아주 많은 대화를 했을 것이다.

수능이 끝난 날 시험장에서 나오면, 교문 앞에서 우리 딸 너무 수고했어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대학을 입학한 후로 줄곧 타지에서 홀로 지내는 딸에게 걱정이 많아 달마다 꼬박꼬박 안부를 묻고 종종 맛있는 밥을 사주러 들리곤 했다.

밥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는 학교생활은 어떤지 물어보며 힘든 것은 없는지, 과제는 어떤 걸 하는지 궁금해하고 꼭 마지막은 혼자서도 잘한다며 기특해했다.

방학 때마다 본가로 돌아오는 자식들이 반가워 때마다 가족끼리 다녀올 여행 계획을 세웠다.

대학 졸업식 날에는 당신 얼굴보다도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 그 꽃다발의 주인을 못내 자랑스러워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따금 본가에서 가족이 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 서로 보려는 채널이 달라 리모컨을 쥐고 실랑이를 부리곤 했다.

그러다 겨울 아침이면 온 집안의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리는 바람에 투덜대며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때로는 혼자 버티는 것이 힘들어 보고 싶다고, 잘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해달라 하면

진심 어린 걱정으로 나를 위로해주었을 당신을 떠올린다.



전부, 터무니없는 상상일 뿐이다. 단 한 줄도 존재한 적 없었으나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는

나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당신은 나의 세상이었고 나는 부서진 나의 세상을 내려다보며 아주 오래 부질없는 상상을 했다. 당신이 돌아오는 상상을,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했다. 나는  꿈속에 갇혀 부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것들을 그만두고 말았다.

지쳤다는 핑계로 늘 필요할 때의 당신만 떠올리는 것이 너무 죄송해서

그리고,


비록 내 세상에 당신이 없더라도

또 다른 평범한 일상을 위해 실재하는, 나의 수많은 것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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