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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Feb 19. 2022

어바웃 타임

열다섯 번째 공백

예전에, 엄마가 가족끼리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무슨 영화? 물었더니 ‘어바웃 타임’을 보고 싶다고. 그래서 엄마, 형제와 함께 늦은 밤 영화관을 찾았다. 가족이서 다 같이 영화를 보러 온 건 거의 1년 만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먼저 보고 싶다고 하신 건 더 오랜만이었고.

엄마가 티켓을 예매하는 동안 형제는 한 손에 팝콘을 사들고 왔고, 우리는 곧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꽤나 늦은 시각인데도 상영관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우리는 조금 앞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거 무슨 내용이야? 사전 정보 하나 없이 따라 나온 탓에 흘러가는 광고를 보며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가족 영화던가? 엄마도 잘 몰라. 근데 지금 엄청 인기래, 주변에서도 다들 꼭 보라고 추천하더라.’ 하며 대답하시곤 형제가 산 팝콘을 두 움큼 쥐어 한 움큼을 나에게 덜어주셨다.



***



예상한 대로, 영화가 끝날 즘의 나는 울고 있었다. 정확히는 눈에 힘을 꾹 주고 눈물을 벅벅 닦아내면서 엔딩크레딧을 맞았다. 상영관 불이 켜지자 하나둘 일어나는 사람들을 따라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제는 팝콘 한 통을 혼자서 다 먹었다.

집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엄마가 물었다.


"너희라면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을 때, 그 능력을 쓰고 싶어? 쓴다면 어디에 쓸래?"


형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쓸 것 같은데, 몇 번 쓰다가 관둘 것 같다고 했다. 엄마가 이유를 묻자, 자신은 나비효과를 어느 정도 믿기 때문이라고. 영화에서도 그랬듯, 자신의 사소한 선택들이 언젠가의 미래에, 혹은 누군가의 미래에 큰 변화를 줄지도 모르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차라리 안 쓰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하며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호는?”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나도 형제가 대답하는 동안 함께 생각했다. 아마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이미 시간을 셀 수 없을 만큼 되돌리지 않았을까. 나는 지나간 아쉬움이나 미련, 후회 따위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성격이니까. 이 성격은 지금까지도 여전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엇이든 분명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를 불행하게 했던 순간들은 피할 수 없더라도, 나의 사소한 실수나 선택, 포기 따위를 번복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내가 느꼈던 고통과 부정적인 감정들의 반은 덜어낼 수 있을 거라고, 영화를 보기 전에도 이미 수 없이 상상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내가 가장 되돌리고 싶은 시간은 능력을 수백 번 써서라도 돌이킬 수 있지만, 그게 전부라는 것.

시간을 되돌린다 하더라도, 정말 내 선택들을 번복할 용기는 없었다. 형제의 말처럼, 영화의 내용처럼, 과거로 돌아가 내 선택을 바꾼다면 그로 인해 나의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대신 잃게 될지 모른다. 과거의 내 선택으로 인해 힘들 때도 분명 있었지만, 그 덕에 지금 내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게 된 소중한 것들이 많았다. 바꾸고 싶은 순간들이 있지만, 아주 사소한 변화가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결국 똑같이 선택하고 포기할 것이다. 나는 당장의 후회와 미련을 덜어내는 것보다,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



생각을 마친 나는 대답했다. 되돌리고 싶지만, 되돌리더라도, 나는 결국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별다른 이유를 덧붙이지 않았지만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엄마야말로 내 대답에 이유를 들을 필요가 없는 분일 것이다. 엄마는 정말로 지나간 것들을 오래 붙잡지 않는 성격이니까. 그리고 집으로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영화의 ost를 들으며 밤길을 달렸다.



지금의 내가 엄마의 그 질문을 다시 듣게 된다면, 아마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만약 정말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제 나는 미련과 후회로 점철된 순간들보다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로 되돌리고 싶다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지금은 볼 수 없는, 나의 지나간 것들이 살아 존재한 과거의 순간들로.

그것은 아빠와 함께한 시간일 수도 있고, 소원해진 옛 친구들과의 시간일 수도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삶에서 나의 모든 애정을 쏟아냈던 사랑의 순간이나 가장 열정적이던 패기와 청춘의 순간일 수도 있다. 때로는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어느 날일 수도 있고.


그저 영화의 주인공처럼 좋아서, 소중해서, 그 하루를 한 번 더 반복하며 다시 곱씹고 싶을 뿐이다. 지나면 돌아오지 않을, 나의 연약하고 강렬한 모든 순간들이 하루하루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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