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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교사 정쌤 Oct 27. 2024

다시 책을 들었던 그때. 첫 독서모임 – 해방창구

<램프지니>님의 글


 아나운서, 미스코리아, 방송국 pd, 스튜어디스.... 한 살 한 살 나이 먹을수록 꿈이 현실적으로 변한다는데, 이 많은 직업 중 입시에 가까울수록 나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었다. 일을 하면서 다른 나라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다니! 풋풋한 여고생 나에게는 얼마나 매력적인 직업이었는지 모른다. 이루지 못한 꿈이 계속 남았던 건지, 나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자유로운 영혼이 웅크리고 있었던 건지, 남편의 해외발령 소식을 듣고는 내심 신이 났다. 아직 학교도 가지 않은 아이들과의 해외살이. 게다가 남편과는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주말부부 신세였지만 말이다.    

  

 막 해외살이를 시작했을 때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즐거웠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인건비가 싼 동남아로의 이주라 아이들을 돌봐줄 시터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을 주말에만 볼 수 있어서 생활에 관련된 각종 일처리를 영어 울렁증인 내가 다 해야 했지만 그 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아마도 ‘엄마로서의 나’로만 살았던 시간에서 ‘김현진. 그냥 나’로 보내는 시간이 차츰차츰 더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정말로 아이들이 시터와 함께 유치원에 가고 나면 3시간 남짓은 온전히 나의 시간이었다. 한국에서는 어린이집 엄마들과 만나 대부분의 시간을 육아 이야기를 하며 어른 사람과의 대화를 했다면, 외국살이 중에는 한국 드라마, 한국 집값 이야기, 시터나 가사도우미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과 함께하던 모임에서 나 혼자로, 한국에서 동남아로, 육아 이야기에서 그밖에 등등으로.... 분명 바뀌었는데 차츰차츰 이런 시간들이 귀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나 원하던, 아이들 없이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을 이제는 진짜 혼자 보내고 싶어졌다. 아마 이때부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도서관 열람실보다 자료실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중고등학교 때. 그 학창 시절이 무색하게 책을 손에서 놓았던 시절이었다. 연이은 출산과 육아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가만히 돌이켜보면 책의 내용들이 주는 어떤 무게감이 나를 가라앉게 만든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이 행복하게 만드는가’ 이런 생각들로 내 20대를 우울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걸 인식하면서 더 쉽고 재미있는 것을 찾아 책을 손에서 놓았다. 그런데 돌고 돌아 다시 책을 찾게 되다니! 그것도 한국책은 구하기도 어려운 외국에서!      


 몇 년을 손에서 책을 놓고 있었으니, 꾸준히 잘 읽히지가 않았다. 나에게 맞는 책을 이리저리 탐색해 보는 시간도 참 재미있는데 책을 구하기 어려운 외국이라 그것도 어려웠다. 그러던 와중 한국인끼리의 독서모임 멤버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았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슬프게도) 외국에서는 한국 사람을 더 조심하라는 말이 있는터라... 잘 모르는 한국 사람들과의 만남을 평소 같으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책으로 연결된 모임이라니 의심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름다운 도시 보니파시오에서 한 달에 한 번. 우리 다섯 명의 책으로 통하는 모임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여자라는 공통점 하나뿐, 직업도 성격도 나이도 제각각이었다. 위대한 개츠비를 시작으로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건지감자껍질 북클럽, 채식주의자, 안나 카레니나 등. (기록을 해 두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기억나는 게 이 정도라 아쉽다.) 나의 독서력에 비해 깊이 있는 독서가 필요한 책들이라 버거울 때가 더 있었지만, 온전히 책 이야기로 가득 채워지는 그 시간이 참 기다려졌다. 모르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이렇게 풍성해질 수가 있다니. 이렇게나 나를 보여줄 수 있다니. 온전히 나로 있는 그 시간이 그렇게나 소중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아마다 그 감정은 해방감이 아니었을까! 거의 모든 시간을 육아에 내어주던 더 젊은 날의 새댁도, 해외에서 주말부부하며 짊어졌던 아내와 집안 관리자라는 무게감도, 책이야기로 가득한 보니파시오의 카페에서는 0이었다. 그냥 나. 얕든, 깊든 나의 경험과 생각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다른 사람들의 풍부한 감성과 생각과 경험들을 경청하며 감동을 느끼는 오롯한 나.    

  

 한국에 돌아와서도 개인적인 일 중 가장 먼저 한 게 우리 동네 독서 모임을 찾는 것이었다. 해방창구. 소중한 일상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나의 해방창구가 바로 독서 모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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