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교실 속의 생존 기계들

by 쓰는교사 정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모든 생물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고 했다. 인간 또한 우리 안의 유전자를 전달하는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생존 기계이다. 어떤 유전자가 살아남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엑셀로드는 죄수의 딜레마를 활용한 ‘반복된 죄수의 딜레마’를 사용하여 컴퓨터로 단순 게임을 무한 반복하게 하였다. 이 실험을 통해 어떤 전략을 쓴 유전자들이 살아남는지를 추측해 보았다. 교묘한 전략들이 여러 개 있었지만 승리를 거둔 전략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덜 교묘해 보이는 전략이었다고 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Tit for Tat, TFT전략)’이다. TFT는 처음엔 협력하고 그 후엔 상대의 앞 수를 흉내 내는 전략이다. 내가 먼저 상대에게 협력했을 때 상대가 협력하면 또 협력 카드를 내민다. 하지만 내가 협력 카드를 냈을 때 상대가 보복 카드를 내면 다음번에 보복 카드를 내어 그대로 따라 하는 전략이다. 이때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이 다시 상대가 협력 카드를 내면 나는 또 협력 카드를 낸다는 것이다. 상대가 다시 호의적으로 변하면 호의적으로 행동하는 것, 이전에 했던 보복은 잊어주는 것이다. 이를 ‘관대’라고 했다. 관대한 전략은 오래된 악행을 잊고 이전의 일만 기억하는 것이 특징으로 가볍게 벌하고 과거의 악행을 잊어준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이것이다. 이 게임에서 승리한 전략의 특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마음씨 좋음’과 ‘관대’라는 것이다. ‘유토피아에서나 나올 법한, 마음씨 좋고 관대하면 이득이 된다는 이 결론은 너무 잔꾀를 부려 미묘하게 못된 전략을 제출한 전문가들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지음, 을유문화사


교실에는 다양한 학생들이 존재한다. 개성이 강하고 성격이 모두 다른 학생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이 학생들도 저마다의 유전자를 위한 생존 기계라고 생각하니, ‘너와 내가 애쓰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관대한 마음이 생긴다.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긴 하지만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모둠활동을 하다 보면 잔머리를 굴리며 자기 이익을 잘 챙기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묵묵히 친구들을 도우며 모둠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학생들도 있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을 보면 잔머리 굴리는 학생을 얄밉게 보았고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혼을 내었다. 하지만 요즘은 모둠활동을 하기 전에 이 이야기를 해 준다.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 학생들에게는 너의 교묘한 잔꾀가 더 낮은 점수를 만들 수 있다는 것, 반대로 너무 순진한 학생들에게는 상대방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되 그 사람이 배신을 하면 너도 배신 카드를 꺼내어 사용할 수 있도록 힘을 기르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렇게 설명하면서 더욱 강조하는 것은 높은 점수를 차지한 사람이 마음씨 좋고 관대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들 마음속에서 잔꾀를 부리려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진다. 조금씩 사라진다는 말은 한 번에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교육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주 천천히 느리게 나타난다. 우린 저마다의 방법으로 ‘유전자를 살리고 있는 생존기계일뿐이다’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도 든다. 교사로서도 잔머리를 쓰고 약은 학생에 대한 관대함이 생긴다.


교실은 아이들이 보고 익히고 많은 것들을 안전하게 도전하고 실패해 볼 수 있는 작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다양한 문제상황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실천해 보는 기회가 많아야 한다. 이때 교사가 어떤 말을 해 주는지에 따라서 아이들이 마음씨 좋은 전략을 쓸지, 계속 배신하는 전략을 쓸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처음엔 자신의 방법대로,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교사의 목소리가 들어간 방향의 방법을 한 번씩 더 해보고 그것이 효과가 있을 때 더 확실하게 그 방향으로 행동한다.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유전자가 교육으로 바뀔 수 있을까에 대한 논쟁을 다루지 않았다. 저자 나름의 의견은 있으나 그것을 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점이 더 좋다. 과학자는 말하지 않았지만, 교사는 ‘마음씨 좋음’과 ‘관대’를 가르칠 수 있는지 실험하는 마음으로 가르칠 수 있다. 사람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기에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과학적으로 이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교실 내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어떤 환경으로 교실을 채울 것인가는 교사가 지향할 수 있다. ‘마음씨 좋음’과 ‘관대함’이 넘치는 다정한 교실을 지향하는 것은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유전자의 생존 기계일지라도 서로를 돕고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음을 배우는 교실을 꿈꾼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만 옳다고 생각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