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어린이날의 기록
아이가 맞이하는 5번째 어린이날이다. 물론 첫 번째는 내 뱃속에서.
작년부터 나는 자아와 주관이 뚜렷해진 아이를 컨트롤하기 위해 내 육아관을 새로 정립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장난감 사달라는 대로 사주지 않기'이다.
뭐 애초에 사달라는 대로 사줘 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건 대부분 갖게 해 주었었는데 금전적인 문제도 그렇고 경제관 확립에 좋지 않을 것 같아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
"엄마 이거 사죠"
"안돼. 오늘은 장난감 사는 날 아니야"
"으아아앙!!! 사죠! 사죠! 사죠오~~~!!!"
"앞으로 장난감은 사달라는 대로 사주지 않을 거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그리고 아쥬(아삼주니어) 생일에만 살 수 있어. 그날 외에 장난감을 갖고 싶으면 엄마가 붙여주는 칭찬스티커 다 모으면 사줄게"
1년에 3번이라. 너무 가혹한가? 싶은 생각도 했다. 하지만 현재 집에도 장난감이 부족한 편은 아닌데 곧잘 싫증이 나버리는 아이의 취향을 따라가다간 장난감집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며 나를 다잡았다.
처음 말할 때 느껴졌던 죄책감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작아졌고 콕콕 찔리는 느낌도 없어질 때쯤 거짓말처럼 아이의 떼도 사라졌다.
"엄마 이거 사죠"
"안돼. 오늘 장난감 사는 날 아니야"
"... 왜?"
처음엔 납득하지 못하며 무수한 물음표를 남발하던 아이가 이제는 함께 마트에 가도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또 그 나름대로 마음이 아프더라.
어린이날 이틀 전부터 내가 들떠서 아이에게 말했다.
"이제 한 밤 두 밤 자고 나면 어린이날이야! 아쥬 장난감 살 수 있는 날! 뭐 갖고 싶어?"
"음.. 음.. 다크팡"
"음.. 그건 아무리 찾아봐도 없던데.. 장난감 가게에 가서 있으면 사줄게! 그거 없으면 뭐 갖고 싶어?"
"음.. 음.. 모르게떠"
"책은 어때? 책 사줄까?"
"죠아"
이틀 뒤라는 게 아이에게 너무 멀게 느껴진 걸까? 크게 설레거나 흥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어린이날 전날은 아빠와의 면접교섭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를 만나고 돌아오는 아이의 손에는 커다란 포클레인 장난감과 영양제가 잔뜩 들려있었다.
"우와~ 아쥬야. 이거 뭐야? 우와 ~ 포클레인 엄청 커! 이거 봐 운전도 할 수 있네? 멋진데? 아빠가 어린이날 선물로 사줬어?"
"응"
하지만 아이는 나만큼도 그 포클레인을 조종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여전히 찬밥신세다.)
대망의 어린이날이 밝았다. 나와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장난감을 사러 가기로 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흥미가 없어 보였다. "아쥬야, 얼른 씻고 옷 갈아입어야지! 장난감 사러 안 갈 거야?"
"응. 안 갈래. 집에 이쓸래"
"...?"
장난감 사러 가는 것보다 집에서 놀고 싶다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겨우 토이저러스에 도착했다. 거긴 나와 같은 부모님들이 수없이 많았다. 장난감을 계산하려고 선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매년 어린이날에 장난감 가게에 갈 때마다 어린이날 하루의 매출이 나머지 364일의 매출보다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끝이 없는 인파 속에서 무슨 장난감이 어디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고 그저 사람을 헤쳐지나 가는 행위를 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어느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지옥이야"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여기는 누군가에게는 천국이고 누군가에게는 지옥이구나.
아이는 레고를 가지고 노는 코너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레고도 종류가 왜 그렇게 많은지 장난감 코너의 1/4은 레고 같았다.
"아쥬야, 우리 이거 사가서 집에서 할까? 재밌겠다"
"아니"
"왜~? 지금 하고 있는 게 레고야. 이게 지금 아쥬가 하고 있는 거랑 똑같은 거야"
회유해 봐도 아이는 관심 없단 듯 고개를 돌리고 레고를 가지고 노는 것에만 집중한다.
"아쥬야, 이건 어때~? 지금 아쥬가 하는 거처럼 이렇게 만드는 거야!"
6~8살이 할 수 있는 레고를 찾아 할아버지와 번갈아가며 아쥬에게 들이밀었다. 12번쯤 반복된 질문에 아이는 귀찮은 듯 "블록은.! 집에 있짜나" 라며 당당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 너는 갖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가지고 놀고 싶은 거구나. 다시 생각하니 참 현명하다. 나는 그 책이 읽고 싶으면 사고, 그 옷이 입고 싶으면 사고, 그 물건을 쓰고 싶으면 사는데 아이는 갖고 놀고 싶은 욕망과 소유욕을 철저히 구분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소유권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구매를 해야 하고. 하지만 아이의 장난감처럼 친구집에 있거나, 키즈카페에 있거나, 대여할 수 있는 물건의 경우 꼭 소유와 사용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5살짜리는 벌써 그 차이를 이해한 걸까? 이 아이는 지금 레고를 가지고 노는 게 재밌는 것이지 이걸 집에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말하다 보니 장난감을 안사준 변명 같아 그만하겠다.
생각해 보니 몇 달 전 친구집에 놀러 갔을 때 움직이는 강아지 인형이 맘에 드는 듯 하루종일 가지고 놀고 집에도 가져가려고 하길래 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내가 사줄게 그 강아지 장난감"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바로 쿠팡에서 강아지 장난감을 주문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불을 끄고 누워있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나 "나 포포 필요 없어. 안 살래"라고 얘기하는 게 아닌가. 너무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에 당황해서 "응? 포포 필요 없다고? 왜?" 라며 여러 번 되물었으나 아이는 "포포 안 사도 돼~"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정말 필요 없어? 그럼 주문 취소한다?" 겁주려고 얘기한 말에도 "응"이라며 쿨하게 대답하는 아이. 그래서 나도 쿨하게 취소했다.
이쯤 되면 엄마가 너무 장난감을 못 사게 해서 아이가 지레 포기해 버린 게 아니냐는 힐난이 들어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억울하다. 무작정 사주지 않겠다고 얘기한 적도 없고 단지 정해진 날에만 살 수 있다고 몇 번 얘기했을 뿐이다. (ㅠㅠ)
결국 토이저러스에 있는 수많은 장난감 중 어떤 것도 아이의 간택을 받지 못했고 우리는 빈손으로 장난감 가게를 나와야 했다. 이대로 집에 가기는 아쉬워 아이에게 옷과 모자를 선물해 줬다. 아이가 직접 고른 모자로.
어차피 이 무소유의 정신이 평생 갈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 아파할 거 없이 미안할 거 없이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 차곡차곡 적립해 둔 미결제건들이 어느 순간 빵 터져서 "아이폰 사줘", "구찌 신발 사줘"가 되지 않기를..
미안하지만 그건 어차피 안 사줄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