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아이와 신나게 웃으며 숨바꼭질을 하던 중.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자 말씀을 시작하시는 할머니.
"내가 딸이 53인데 이런 걸 보면 후회가 너무 많이 돼. 그때는 이렇게 같이 놀아주지도 않고 손도 안 잡아주고 울면 때리기나 하고 그랬거든. 이런 장면을 보면 아직도 마음이 너무 아파."
따님이 자식을 넘어 손주를 볼 나이가 되셨는데도 놀고 있는 5살짜리 내 아이를 보며 후회를 곱씹고 계시는 할머니. 더 이상 딸과 놀이터에서 놀아줄 수도 없는 나이가 되셨지만 아마 그분은 앞으로도 계속 딸과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꿈꾸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인 사정은 모른다. 아마 그분의 딸은 어릴 때 잦은 폭력으로 어머니와 의절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냥 그 시대에 먹고살기 바빠 신경을 잘 못 써준 것일 수도 있고. 이 모든 게 내 상상에 불과하지만 확실한 건,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눈은 회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육아란 뭘까.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주고 내 몸을 갈아내며 키워도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은 도대체 뭘까.
어린이집 연장반 선생님이 신발장에서 인사하면서 하시는 말씀.
"저는 집에 아들이 초등학생인데 다시 키우고 싶어요. 이 나이 때로 돌아가면 이젠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5살인 아이를 보며 하시는 말씀이었다. 선생님의 자녀는 다행히 50대는 아니었다.(선생님도 50대가 아닌데 당연한 소리) 아직 내 손으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할 날이 수천일은 남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세월이 후회가 되시나 보다. 듣고 보니 나도 그렇다. 5살인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750g으로 태어났다!) 백분위에도 미치지 못하는 몸무게로 살고 있는데 병원에서 막 퇴원한 신생아시절, 분유를 조금만 많이 먹으면 자꾸 두배로 토하길래 가끔 새벽수유를 건너뛰곤 했다. 그때 새벽수유를 안 해서 그런가, 그래서 뱃고래가 작은 건가. 그 뒤로도 난 꾸준히 자책했다. '그래도 먹였어야 했나'하고. '토하더라도 그때 많이 먹였여야 했나. 인큐베이터에서는 잘 먹었다는데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모든 게 무섭고 서툴던 시절. 그래도 어떻게든 작은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것들 중 뭔가 놓치지 않았나, 실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했더랬다.
내 목표는 후회를 남기지 말자!이다. 사실 육아에도 그렇고 삶에도 그렇지만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이란 참 어렵다고 생각한다.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 때면 그때의 내 결정은 늘 차선책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뒤따라 오니까. 물론 후회한다고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감정들이 간혹 앞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이라는 수많은 글 중에서 어떤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그때 내 자유가 구속당한다고 생각해서 육아를 즐기지 못한 것"
어차피 자유는 구속당해 있고, 현실은 바꿀 수 없는데 불평불만만 하고 있는 육아는 전혀 즐겁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느냐 참는다고 생각하며 보내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다. 물론 쉽지 않다. 특히 나처럼 뭔가를 꾸준히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루하루의 난이도는 크게 높지 않지만 그게 매일매일 365일 x4년간 이어져오고 있는 지금이. 하지만 쉬고 싶을 뿐, 불행하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행복하다. 어차피 육아 안 하면 핸드폰이나 보면서 시간 죽일게 뻔한 나라는 인간에게 하늘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라도 준 것 같다. 전혀 논리가 없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5살 꼬맹이를 보며 욱할 때도 있고, 화내놓고 후회하는 일도 부지기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아이와 나 스스로를 키워낸다.
아직 초보엄마에 불과한 나는 '후회를 남기지 않는 육아'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것은 나중에 비로소 후회가 들 때가 돼야 알 수 있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그 후회는 내가 빠져 허우적거릴 늪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의 지침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나는 매일 아이를 사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