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나를 대하길 바라는 방식으로 남을 대하라"는 말은 흔히 들리지만, 정작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나 역시 내가 당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남에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딱 한 가지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있다. 바로 “왜 그랬어?” 라며 따져 묻는 것이다.
비난의 말 중에서도 특히 나는 “왜 그랬어?”라는 말을 싫어한다. 지각을 하거나 일처리가 늦었을 때 왜 그랬냐고 하면 “그냥 좀 꾸물거렸어요”, “어쩌다 보니 늦어졌어요”라는 말 외에는 마땅한 답이 없다. 특히, 일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왜 그렇게 했냐고 하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이상에는, 나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자책하라는 말밖에 안 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종종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 아침에도 출근길에 사고차량이 있어서 20분 정도 지각을 했는데, “왜 늦었어?”라는 상사의 말에 설명 없이 “죄송합니다” 하고 말았다.
대부분 저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실제로 늦은 이유가 궁금해서가 아니다. 그러니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저 죄송하다고 하면 끝날 일이다. 핀잔을 주고 싶어서 질문처럼 던진 한마디에 눈치 없이 반응해서는 안 된다.
물론 "왜 그랬어?"라는 질문이 나쁜 의도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진심에서 비롯된 물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질문이 자칫 비난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미 잘못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에게 원인을 따지듯 묻는 말은 변명이나 방어적인 태도를 이끌어낼 뿐이다.
사람들은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추궁당하기보다는 이해받기를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왜 그랬냐는 질문 대신 건네는 위로의 말 한마디가 주는 의미는 생각보다 클 수 있다. 잘못된 결과는 이미 돌이킬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완전히 외면당하지는 않았다는 확신이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굳이 이유를 묻지 않는 태도는 그 자체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네가 이미 충분히 고민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는 신뢰의 표현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신뢰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책임회피나 변명에서 벗어나 문제를 직면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으며, 때로는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도 많다. 심지어 스스로의 행동조차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우리에겐 실수에 조금 더 관대하고, 타인의 불완전함을 용납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왜 그랬어?"라는 말 대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과 함께 한 번쯤 눈감아 주는 태도는 누군가에게 깊은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런 이해와 여유가 쌓일 때, 우리는 더 따뜻하고 신뢰 깊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누구나 원하는 관계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