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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othing Mar 21. 2023

나는 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 체크무늬 털 코트와 흥분과 기대가 뒤섞인 그날. 하얀 얼굴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인사를 건네던 너와 너에게 느낀 이질감과 책임감 그리고 배신감, 좌절감. 까만 얼굴과 듬직한 손바닥으로 내 등을 쓸며 인사하던 너도. 우직하던 너와 어울리지 않았던 꽃과 같은 이름, 포용, 따뜻함, 우정. 우리는 어쩌다가 인연이 끊겼을까?


 나는 기억한다. 기다란 자주색 치마를 늘어뜨린 채 앉아있던 학교 뒷동산의 의자.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까지 할 일 없이 앉아있던 우리. 삼 년 뒤 꼭 와보자며 질척한 흙을 파내어 타임캡슐을 묻던 우리. 꺼내보지도 못한 채 그 안의 글들은 소멸하였지. 마지막에 본 너는 왜 그리 차가웠을까? 빨간 유니폼을 입고 퀭한 얼굴로 날 흘겨보듯 하는 너의 얼굴이 잊히지 않아. 내가 너의 피로였을까?


 나는 기억한다. 메일을 클릭하던 조급한 나의 손가락. 영영 답장이 없는 메일을 수시로 들락거리던 심장의 두근거림. 걱정은 궁금함이 되고 궁금함은 원망으로, 원망은 불같은 화로, 화는 무력감으로 점철되던 회색의 시간. 나는 그때부터 심장의 고동이 불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흡의 갑갑함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입을 뻐끔거려야 숨을 쉴 수 있던 순간들. 까만 어둠에 붙잡힌 엄마와 외면하는 나. 나는 죄책감이 무엇인지 그때 깨달았다.


 나는 기억한다. 카세트테이프 속 우리의 비밀. 어둡고 축축했던 노래방. 뿌연 연기 속 어린 웃음소리들. 반지하의 몽롱함. 치기 어린 반항의 혀끝. 우리는 새까맣게 타버리길 갈망했지만, 보드라운 뺨에 숯검정만 묻히던 지난날의 순수. 선망과 열망 사이의 오독.


 나는 기억한다. 불면의 공허함.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돋아난 날개로 검은 구름 사이를 배회하던 그날. 윤슬이 반짝이던 강은 단단한 돌로 굳어지고 옹송그린 어깨가 진물이 되어 흘러내리던 날. 모든 것은 목구멍 뒤로 꿀떡 삼켜지고 그 모든 것들을 명치에 가두는 법을 깨달았다.


 나는 기억한다. 불현듯 나무에 핀 새순의 연두가 선명해졌을 때, 하찮은 나무의 잔가지들이 모여 장대함을 만든다는 것을, 봄날의 밤 스치는 벚꽃 나무의 향기가 이토록 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날. 입을 크게 벌려 들이마시는 숨이, 한가득 머금다 내뱉는 숨이 이리도 산뜻할 수 있는지, 명치에 막혀있던 모든 것들을 조금씩 게워 내는 법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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