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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인상을 남긴다

그녀는 지갑에 남은 40밧으로 코코넛 주스를 사 마시겠다고 했다

by 베르고트

방콕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D에게 말했을 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행은 좋지만, 여기서 살고 싶지는 않아. 너무 덥고 음식도 안 맞아.” 나보다 태국 음식이 더 안 맞았던 D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지 못해 고생하고 있었다. 일식도 별로였고, 양식도 그냥 그랬다. 피자를 좋아하는 D를 위해 외국인이 가장 많이 모이는 카오산 로드에서 피자를 먹어봤지만, 좋은 밀가루가 아닌지 솜씨가 없는 건지 도우부터 형편없었다. 그래도 D를 설득해 보고 싶었다. 몇 개월 후 결혼할 그가 방콕에 신혼집을 차릴 리는 만무하나 그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 도시가 나를 끌어당긴 이유를 다시 헤아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느긋함이 있고 물가가 저렴하다는 점 말고도 이 도시엔 뭔가가 더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여느 때처럼 확신이 없는 말투로 나는 주절거렸다.


“상상해 봐. 낮에는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밤이 되면 카오산 로드에 가서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는 거야. 옆 테이블에 있는 아무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재미있는 놈도 만나고 멋진 놈도 만나고 때로는 미친놈도 만나고 그러는 거지. 매일이 여행 같을지 몰라….”


그때, 희끄무레하던 심상이 비로소 뚜렷한 형체를 갖추는 걸 느꼈다. 나는 이 도시의 얼굴이 다양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짧든 길든, 휴가로 왔든 생각이나 관계를 정리하러 왔든 수많은 여행자가 찾는다는 것. 그런 방문자를 맞이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고유의 문화와 외래의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목격하는 생경한 풍경이 나를 흥분시킨다는 것.





우리가 방콕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명소는 주말 재래시장인 짜뚜짝 시장이었다. BTS 노선 끄트머리에 있는 모칫 역은 꽉 막힌 혈관 속으로 혈액을 보내는 심장처럼 드넓은 공원과 시장 쪽으로 사람들을 꾸역꾸역 밀어내고 있었다. 현지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온갖 인종들이 땡볕 아래 기념품이나 옷가지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꽤나 볼 만했다. 햇살보다도 그 햇살을 반사하는 얼굴들 때문에 나도 익어가는 기분이었다. 녹색 물감을 너무 많이 짜놓은 듯한 공원의 녹음과 색 바랜 천막이나 한국에서였다면 곧 재개발에 들어갔을 법한 낡은 건물이 모인 시장 사이의 부조화도 기가 막혔다. 이런 장소에 오면, 지금까지 어떤 기분이었든 간에, 분위기에 휩쓸려 걸음도 바빠지고 목소리도 높아지며 괜히 웃음이 나오곤 한다. 생각을 좀 하셔야죠? 아뇨, 일단 감탄부터 좀 하구요, 송끄란이 아닌 게 좀 아쉽습니다, 여기에 물바가지를 퍼부으면 쇼핑하기 딱 좋은 온도가 될 텐데 말이죠.


인도를 따라 노상 식당이 진을 쳤길래 아무 곳이나 골라 점심을 먹었다. 전파사 진열장 텔레비전에 서로 다른 나라의 방송을 틀어놓은 것처럼 온갖 언어가 들려왔지만, 메뉴를 주문하는 방법은 다들 한 가지였다. 손가락으로 사진을 짚고 두드리기. 파리가 음식 위로 저공비행을 해도, 포장을 뜯은 순간부터 한 번도 씻지 않았을 것처럼 때가 꼬질꼬질 낀 소스 통이 식탁 위에 놓여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반면, 내가 질색하는 고수풀을 정말 맛있게 먹는 금발의 남성을, 설거지한 물을 그냥 하수구에 쏟아버리는 아주머니를, 속옷이 다 드러나는 차림으로 뉴욕 5번가에서도 볼 수 없을 시크한 걸음으로 지나가는 길쭉길쭉한 연인을, 나는 신경 써서 바라보았다. D는 썩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지만 내 입으로 들어오는 돼지고기 볶음밥을 꽤 맛있다고 여기며 시장의 근육이 얼마나 활기차고 강인하게 움직이는지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시장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더욱 흥미진진한 판이 벌어졌다. 매대 위에는 조악한 수공예품부터 코끼리가 그려진 에스닉한 옷이나 가방, 흥미로운 성인용품과 명품 브랜드 모조품 따위가 잔뜩 쌓여있었다. 가격은 천차만별이었고, 흥정은 필수였다. 가장 심약해 보이는 사람까지도 일단 값은 깎고 보는 것 같았다. 그러면 주인은 아주 당연한 요구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본래 마음에 두고 있던 가격으로 답했다. 관광지 티켓에 포함된 쇼처럼 에누리가 이곳의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몰랐다. 훗날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까지 가게 되면, 우리의 친구 D가 흥정의 마술사로 거듭나 나를 놀라게 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많은 상인이 이렇게 많은 상품을 가져다 팔면 치열한 경쟁 때문에 돈이나 벌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좁은 통로를 가득 메운 여행자와 구경꾼과 의욕적인 손님 들을 보면 그것이 기우에 불과함을 알게 됐다.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을 물건이 누군가에게는 이 나라 이 도시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기념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방방곡곡에서 별의별 욕구와 안목과 취향이 다 모여들었으니 각국의 화폐(5만 원 짜리도 있었다)가 겉에 그려진 지갑이라든가 중지를 치켜든 건방진 미키마우스 티셔츠 따위를 집어갈 주인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실망스러울 땐, 그렇다, 시장에 나가보는 것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최소한 내 물건을 사갈 누군가를, 내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파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로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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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뚜짝 시장이 세계인의 재래시장이라면, 방콕에는 아예 대놓고 국제적인 도시로서의 위상을 뽐내는 현대식 쇼핑몰도 있다. BTS 아속 역, 그러니까 스쿰윗 대로에 있는 터미널 21이 그렇다. 공항 터미널을 테마로 한 이곳은 각 층에 세계 유력 도시의 이름을 붙이고 그 이미지대로 실내를 꾸민 - 심지어 화장실까지 - 놀라운 콘셉트를 보여준다. 파리, 런던, 도쿄, 이스탄불, 거기에 할리우드와 샌 프란시스코까지. 아쉽게도 한국의 도시는 없었다. 한 층 전체에 기와가 얹어지고 돌담으로 매장을 나누며 타이포그래픽으로 한글이 사용된다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울까. 무려 600개의 매장이 입점해 있고 푸드코트와 극장을 갖췄으며 36미터짜리 에스컬레이터가 명물인 이 쇼핑몰에서 다른 어떤 층에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여행지 속에서 다시 세계로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는 터미널21은 매매라는 같은 목적이 있음에도 짜뚜짝 시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도쿄와 할리우드로 오르내리며 나는 어린아이처럼 정직하게 감탄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이니까 이런 기막힌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었으리라. 이곳은, 그러니까 사람보다는 형식과 주제 자체가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밖으로 나가 길 하나만 건너도 왁자지껄한 노점이나 유흥가, 한적한 골목이 나온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후에 찾은 시암 지역의 쇼핑몰들도 화려하기로는 이곳 이상이긴 했다. 하지만 현대적이면서 동시에 내 기호에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은 바로 이곳, 터미널 21이었다.



물론 방콕의 다양한 얼굴은 태국이란 나라의 독특한 구조에서 비롯된 면도 있다. 국왕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도 국민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보내며 - 어쩌면 정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존경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 국교인 불교가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고 신앙심도 높다. 국왕과 종교. 절로 엄격하고 폐쇄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이곳 시민들의 삶은 오히려 우리보다 자유롭게만 보인다. 그들은 친절하고 잘 웃으며 호기심이 많다. 그러면서 게으름 하나는 제대로 피우기도 한다. 처음엔 당황스럽다가 결국 양손을 들고 차라리 동화되는 편이 낫다는 걸 인정할 정도로 말이다. 반면 거리에서 매춘이 횡행하고 서구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밤새워 놀고 마시며 유흥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이기도 하다. 홍콩보다 그 수는 적을지 모르지만 규모 면에서는 뒤지지 않는 거대한 쇼핑몰과 호텔 들은 어떤가. 자본주의의 독한 냄새가 풍기지 않는가. 신기한 일은 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점이다. 그 힘은 최초에 태국의 국민들, 방콕의 시민들에게서 나왔을 것이고, 거기에 매료되었기에 세상 모든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판이한 문화가 재차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마침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지금의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치열한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이쯤에서 카오산 로드에 가볼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껴두기로 한다. 대신 방콕의 어느 작은 식당을 찾아가기로 하자.





수다 식당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 기쁘다. 스쿰윗 소이 14, 터미널 21 바로 건너편 골목에 있는 이 허름한 식당은 저렴하고 맛있는 현지 음식으로 이름 높다. 처음엔 실내 전체가 파란색으로 칠해진 줄 알았는데, 자리마다 새파란 방수 식탁보가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쓰다듬으면 축축하게 손바닥에 감기고 군데군데 남플라나 커리가 흐른 자국이 닦이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파란색 식탁. 주방과 홀의 경계가 모호하고 빈 병이나 쓰레기가 홀 한쪽에 그대로 쌓여있었다. 그리 위생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빈자리가 거의 없는 성황에 오히려 입맛이 돌았다. 낡고 땟국물이 흘러도 음식은 기똥차게 맛있는 그런 가게들이 연상됐다. 현지인보다 외국인 손님이 훨씬 많았고, 종업원들도 친절했다. 헬로우만 아실 것 같은 뚱한 표정의 할머니가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운 좋게 안쪽 자리로 안내받은 우리는 게를 튀겨 커리와 볶은 푸 팟 퐁커리와 팟타이를 주문했다. 술도 빠질 수 없었다. 태국의 국민주 생솜과 소다수를 시켰다. 가격도 저렴했고, 미리 고수풀을 빼달라고 부탁한 덕분인지 음식이 입맛에도 잘 맞았다. 주변을 둘러 보니 나이가 좀 있고 온몸에 문신을 한 서양 아저씨들이 많았다. 종로 오래된 술집에서 의자에 몸을 반쯤 눕힌 채 술을 마시는 한국의 직장인과 먹고 마시는 폼은 똑같았다. 부어라 마셔라, 그놈은 그래서 안 돼, 세상 참 뭐 같지, 그런데 주식은 어떻게 됐어? 아마 나와 D 역시 그 반 정도의 각도로는 누워서 술을 마시고 있었을 것이다.



생솜 한 병에 시원하게 취해가고 있는 와중에 한 여성이 우리 테이블에 합석했다. 민소매차림에 키가 훤칠하고 긴 머리를 뒤로 넘겨 묶은 백인 여성이었다. 나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손목에 차고 있는 천이나 가죽 팔찌를 어디서 샀는지, 아니 언제 사서 지금까지 하고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면 얼마 만에 풀고 싶은지 묻고 싶어졌다. 헝가리 출신으로 지금은 런던에서 데이터 아날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 그러고 보니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 그 많은 메뉴 중에서 그린 커리를 주문했다. 나로서는 딱 질색인 메뉴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이거 정말 내 취향이야.”라고 말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믿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마시던 술을 권해 보았으나 그녀는 독하다고 거절했고, 대신 우리에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는 모를 작은 도시가 고향이야. 영화관이 하나밖에 없어서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하지 않으면 두세 시간씩 다른 곳으로 가서 봐야 하지. 그런데 그것도 나쁘진 않아. 너희가 아는 헝가리 도시가 부다페스트밖에 없다고? 괜찮아. 나도 부다페스트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녀의 여행에 관한 짤막한 개괄을 말해주었다. 6주 동안 태국과 캄보디아를 여행하다가 내일, 바로 내일, 런던으로 돌아간다고.


“계속 친구들하고 여행하다가 얼마 전부터는 혼자 다니기 시작했어. 마지막 저녁을 여기서 먹고 싶어서 다시 온 거야.”

“우린 이제 막 시작이니까 그 기분을 상상하진 않을게. 아쉽진 않아?”
“아쉽지. 그러니까 여기에 온 거야.”


누군가의 여행, 그 마지막 선택지에 함께하고 있었다.


방콕을 찾은 많은 나그네가 그러하듯, 그녀도 세상 이곳저곳을 천천히 돌아다니는 게 인생의 목표라고 했다. 한국에 가봤느냐고 묻자 아직 가보지 못했으며 잘 모르기도 한다고 대답했다. - 조금 슬펐다. - 언젠가 한국으로 여행 오라고 권하면서 속으로는 내가 외국인이라면 우리나라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하게 될지 상상해 보았다. 서울이라면 잘 놀고 잘 먹는 젊은이들을 구경하며 밤새도록 술을 마시겠지.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었든 고즈넉한 고궁은 좋아했을 거야. 반면 도시는 더럽게 크고 지하철 노선도는 끔찍하게 복잡하다며 툴툴거렸을지도 모르지. 산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지방으로 내려간다면 바다로, 남해로 내려가는 게 좋겠어. 외국의 흥청망청한 해변과는 달리 조용한 바다를 바라보며, 부두와 선창에 다닥다닥 붙은 낡은 배를 카메라에 담으며, 나와 같은 이방인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어촌을 돌아다니는 게 좋겠어.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치르는 그녀에게 조심히 집으로 돌아가라고 인사했다.


“공항에 갈 차비를 빼면 지금 내 지갑엔 딱 40밧 남았어. 이걸로 내일 아침까지 지내야 해. 그러니까 이걸로 코코넛 주스를 사 마실 거야.”


커리를 싹 비우고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궁금해졌다. 내가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지갑에 남은 약간의 지폐로 무엇을 먹겠다고 할까. 그 고민과 함께 여행자의 도시에서, 다른 여행자들처럼, 나도 마침내 여행자가 된 듯한 이상한 기쁨을 느꼈다. 아마 천천히 줄어들고 있는 술 때문이었겠으나 여기에 머물면 언제나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언제나 이런 의외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발견했다. 빛과 어둠의 대비가 있는 도시. 다채로운 구역에 그보다 더 다채로운 수의 사람들이 모인 도시. 살아보고 싶은 곳이 하나 더 생겼다는 말은 언젠가 고를 수도 있는 삶의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능성은 우리를 두근거리게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안심시키기도 하며, 나는 거기에 감사했다. 과연 가보지 않고서는 그곳을 알 수 없다고 믿기를 잘했다. 사람이 그러하듯, 도시의 인상 또한 맞닥트리기 전까진 절대로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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