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

카오산 로드에서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펼쳤다

by 베르고트

카오산 로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밀림 속의 거리, 밀림에 온 도시인의 축제, 그리고 선명, 선명, 또 선명한 원색의 향연. 그 이상으로 적합한 표현은 나에게 오랫동안 숙제가 될 것 같고, 그래도 실마리를 풀 수 없다면 다시 가면 그만이리라.


IMG_8237_ret.jpg
IMG_8239_ret.jpg


우리가 걷는 곳은 정확히 말하자면 카오산 로드의 옆길, 모든 것이 훨씬 밀집해 있는 거리였다. 거대한 나무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건물 위에 가지를 올려놓고, 음악은 공기 중에 떠돌던 것이 스피커를 찾아 스며드는 것처럼 바로 옆에서 요란을 떨었다. 사람들은 고향에선 노출하기 힘든 부위까지 드러내어 오후의 열기를 흡수했다. 거리를 향해 놓인 술집과 카페 의자는 책을 읽거나 지나가는 다른 여행자를 구경하거나 멍한 눈으로 사색(또는 무념)에 잠겨있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삼십 분 전만 하더라도 세상을 쓸어버릴 만큼 비가 쏟아졌는데, 지금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듯 시치미를 뗀다. 노란 햇살이 거리 위로 쏟아졌다. 먼지가 씻긴 대기, 순도 높은 빛을 받아 만물이 꽃처럼 도드라졌다. 너무 많은 피사체 때문에 오히려 카메라를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무엇을 찍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몇 십 장을 모아도 전체를 완성할 순 없을 터였다. 이럴 땐 감각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는 두뇌의 작은 부분이 촬영을 대신해야 마땅한데, 이 장면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는 질료가 내겐 없었다….


나와 D는 좋다는 말만 반복하며 걷다가 이내 그 마저도 그만두었다. ‘몰리 바’란 곳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길 위의 삶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앉은 방향에선 나그네들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교차할 때마다 서로의 입이나 이마나 가슴에 키스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폭도 다르고 목적도 다른 그들은 언제고 다시, 매번 다른 얼굴을 한 채, 영원히 이곳에서 재회할 것만 같았다.



방콕에 가면 누구나 한 번은 카오산 로드에 간다. 나도 그랬다. 배낭여행자의 성지라는 별칭은 가보지 않은 자로 하여금 환상을 품게 하고, 길과 사람이 부리는 마법에 목마르게 한다. 떠나오기 전,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자면, 방콕의 유일한 목적지가 카오산 로드였다. 왕궁이든 사원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아는 지명이 그곳 하나 뿐인 양, 목적이 달성되면 곧장 이 도시를 떠나도 그만이었다. 카오산 로드에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든 상관 없긴 매한가지였다. 그곳이 명성에 걸맞은 무언가를 내게 보여줄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 중요한 문제는 오직 그것이었다. 실망조차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 믿었고, 오히려 실패하길 바라는 치기 어린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우리가 카오산 로드에서 처음으로 만난 건 해괴망측한 여행자도 불 같은 로맨스도 아니오, 어떤 깨달음이나 애달픔을 주는 만남도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의 시간을 만났다. 여행의 동반자로서 같은 공간 안에서 각자의 시간을 누리는 법을 익혔다.





책이 여행의 필수품은 아니겠지만, 그 기간이 일주일을 넘어간다면 없는 것보단 낫다. 종일 이방인과 인사하고 명소를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 눕거나 앉은 자세로 어딘가에서 시간을 죽여야 할 때가 온다. 대체로 그런 날들이 더 많다. 처음 미국으로 가고 싶다는 꿈에 연료를 부어넣은 영화가 「온 더 로드」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번 여행과 함께할 책을 고를 때, 여행의 기원을 기념하며 원작 소설인 『길 위에서』를 들고 온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저자인 잭 케루악은 수년 동안 미국 전역을 떠돌아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제이 차 세계 대전 이후 기존 사회 구조와 문화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젊은이들이 있었다. 비트 세대로 불린 그들은 술과 마약, 각성제인 벤제드린과 섹스에 탐닉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그런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영적인 깨달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궁리했다. 책이 출간됐을 당시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평론가 길버트 밀스타인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추구하는” 세대였고, 케루악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이 실제로 발견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탐색하는” 외로운 탐구자들이었다.


저자 자신이 투영된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가 딘 모리아티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들은 길 위의 삶에 매진하여 네 번에 걸쳐 미대륙을 종횡무진한다. 히치하이크를 하거나 고물차를 몰거나 때로는 다른 무고한 여행자의 차를 대신 운전하며 공포의 질주를 하기도 한다. 딘은 지칠 줄 모르는 태양과 같은 남자, 한여름 사막에 내리쬐는 태양처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미쳐가는 - 또는 완성되는 - 남자다. 그리고 두 사람의 여정에 얽히는 수많은 남녀는 비트 세대를 열광하게 만든 행위 - 술, 담배와 마약, 난잡한 성교 - 의 모범을 그대로 따른다. 그들은 처음엔 자유를 만끽하는 행운아로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누리는 게 자유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불안을 누린다. 정체停滯에 대한 불안, 만나거나 도달해야 할 대상에 닿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내가 그들에게 반한 이유는 그 불안이 지금 우리 세대가 앓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닮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은 그것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미래의 불안이 아니라 지금 당장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불안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여행 중에 벌이는 미친 짓에 끌린 것도 사실이었다. 흉내내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는 여행의 지침서로 삼겠노라고 말이다.



비행기나 숙소에서 조금씩 읽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 건 카오산 로드에서였다. 이 길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버젓이 돌아다닐 것만 같았다. 처음엔 그들을 찾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조우의 가능성만 음미하며 책 속에서 그들과 어울리는 쪽이 좋았다. 하지만 뉴욕에서 덴버로 가기 위해 히치하이크를 하는 샐 파라다이스의 뒤를 쫓고 있자니 몸이 근질근질해져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무엇을 부러워 하겠어, 나도 지금 길 위에 있는 걸!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내 안에서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냐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을 경험하는 것이 먼저냐. 여행 내내 나는 이 두 가지를 놓고 무엇이 정답인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나 또한 뭘 찾고 있는지도 모른 채 찾을 수 없는 것을 찾는 방랑자처럼 굴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런 혼자만의 시간을 서로에게 주자고 했던 나와 D의 약속에 있다. 홀로 여행하는 게 아닌 이상 우리는 서로를 제약한다. 벌써 다섯 번이나 함께 여행한 사이라 해도 여정이 길어진 만큼 먹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들 간의 차이도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양보와 설득, 포기를 반복하며 서로에게 맞춰가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실 별로 어렵진 않았지만,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다만, 나는 여행 전에 D에게 이런 부탁을 했었다. “하루에 두세 시간만이라도 나에게 시간을 줘.” 글을 쓰든 책을 읽든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자는 말이었다. 틈틈히 여행 노트를 쓰는 내 버릇을 잘 아는 D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두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몽땅이라도 괜찮아.” 그 대답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물론 나만 그런 독립적인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결혼이라는 인생 최대의 사건을 앞두고 여행 온 남자의 마음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마냥 행복하고 기대에 부풀지만은 않을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한 여자와 가정을 꾸린다. 아이를 낳고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그 후로 오랫동안 두 사람은 행복했습니다, 라는 문장은 이제 동화책에도 잘 쓰이지 않는다. 어쩌면 십수 년 정도는 나라는 희미한 존재를 부여잡고 희노애락의 파도 위에서 정처없이 떠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내 앞가림도 벅찬데 친구의 심정까지 헤아릴 여력은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신했다. 그에게도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 무언가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IMG_8253_ret.jpg
IMG_8272_ret.jpg


나는 책을 읽다가 길 위의 풍경과 얽혀 치밀어오르는 감상을 끼적였고, D는 사람 구경을 하다가 여행 안내서를 탐독하며 가볼 곳은 없나 물색했다. 가끔 맥줏잔만 부딪힐 뿐 한동안 서로 말도 없었다. 날벌레 한 마리가 내 맥주에 빠졌지만, 과자가 떨어져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순 없을 만큼 가볍게 건져내고 목을 축였다. 편안했다. 마음이 급해지지도 않았고 집중이 흐트러지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각자의 일이 마무리 되었다 싶으면 스프링이 튀어오르듯 기분이 좋아졌다. 맙소사, 이러고 여유를 부렸음에도 아직 엄청난 시간이 남아있었다.


“우리가 원래 미국에 가기로 했었잖아.” 쇼파에 앉아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한 아주머니를 동질감을 갖고 바라보며 내가 말을 꺼냈다.
“그랬지.”
“근데 여기에 오길 더 잘한 거 같아.”
“어, 천국이 따로 없어. 여기가 천국이야.”


해가 저물고 조명은 밝아졌다. 음악 소리가 대화를 나눌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 모기가 몇 마리 있었지만 - 내가 나대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맑아졌다. 바다가 보이고 해먹이 흔들리는 휴양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지친 도시인에겐 이곳조차 과분했다. 뭐라도 먹자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쿠션 좋은 의자에도 빗물 다 마른 거리 위에도 사람이 배로 늘어나 있었다. 더는 혼자 있을래야 혼자 있을 수 없는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