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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 같은 그 나무

거목에서 얻은 평안을 저버리기로 하고

by 베르고트

우리가 치앙마이에서 잡은 방은 네 벽이 모두 나무로 되어있었고, 화장실 수압은 턱없이 약했다. 이미 말했듯 자물쇠로 문을 잠가야 하며, 방 안에는 작은 도마뱀 두 마리도 살고 있었다. 무려 에어컨도 있었다. 한참을 틀어놔야 간신히 방 안 온도가 일이 도 떨어질 만큼 성능이 시원치는 않았다. 예전에 유럽을 여행하며 빈대로 고생한 경험이 있는 D는 침대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다행히 벌레가 득실거리는 침대는 아니었지만. 화장실에는 온수기도 설치돼 있었으나 전원 켤 일은 거의 없었다. 찬물도 미지근했기 때문이다. D의 표현을 빌리자면 “샤워를 하면서 땀이 나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그러나 가격을 생각하자면 더할 나위 없는 숙소임에는 분명했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 방을 퍽 마음에 들어했다.


문제는 피로였다. 일주일 동안 매일 술을 마신 탓에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덥다’, ‘찝찝하다’라는 불편은 둘째 문제였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지는데 낡은 오두막이 대수일까. 노을 질 무렵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것 같은 도시라고 생각했던 치앙마이는 사실 새벽까지 음주가무를 즐길 기회가 널려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님만해민 같은 신시가지에서도, 경건한 사원이 지척에 있는 구시가지에서도 밤을 헤려는 자에겐 그만큼의 보상이 뒤따르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우리는 해가 중천에 뜰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떠 띵한 머리와 젤리처럼 요동치는 속을 부여잡고 후회 아닌 후회를 하곤 했다. 우리는 침대에 널브러진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어제 몇 시에 잔 거지?”

“새벽 네 시였나?”

“술은 얼마나 마신 거야?”

“그걸 기억하면 술을 마신 게 아닐 거야.”


그리고는 손만 겨우 씻고 잠들었을 때의 찝찝함을 개탄하다가 해장 음식으로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니, 토론이라기 보단 말로 메뉴판을 쓰는 작업이었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기 직전엔 어젯밤도 즐거웠다는 결론을 내리며, 아주 생산적으로, 오늘 밤엔 어디에 가서 마실지 기대에 부푸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애꿎은 이 나라를 탓하고 싶었다. 방콕이든 치앙마이든 어딜 가도 흥청망청 취할 곳이 한두 군데는 있으니 제시간에 얌전히 자는 게 손해 보는 짓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힘에 부치는 일주일째가 되자 라오스로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지리라 자위하기에 이르렀다. “한 달 중 한 주 정도는 술독에 빠져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또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나라의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마을에 도착하면 책도 읽고 사색도 하며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었다는 진상이 며칠 후 밝혀지지만, 놀기만 하려고 여행을 떠나왔다는 (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하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뭐라도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게다가 언제 또 이렇게 살아보겠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우리에겐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유지해야 할 일상이 있다. 매일 직장에 나가고, 마뜩잖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나이에 따라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과 내 실상 간의 격차를 메우려 애쓰는 일이 그러하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멈춘 오늘만이라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었다. 가끔은 날 방치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 치앙마이까지는 제대로 즐겨보자고 말이다.





님만해민에 괜찮은 라이브 클럽이 많다는 소문은 그래서 우리를 들뜨게 했다. 숙소 부근에서 송태우를 집어타고 구시가지를 둘러싼 해자를 건넜다. 빨간색 송태우는 꼭 우체통 같았다. 우리가 반가운 편지라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우리를 환영해 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송태우 운전사도,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치앙마이 시가지도, 시큰둥하기만 했다. 얼마 달리지 않아 여행자임은 분명한데 송태우를 불러 세우고 갈 곳을 이야기하고 트럭 짐칸 같은 자리로 훌쩍 뛰어오르는 일련의 행동이 마치 현지인처럼 자연스러웠던 백인 여자 한 명이 동행했다. 다들 그 여자에겐 친절해 보였다. 운전사도 어디가 어딘지 모를 밤거리도 그녀가 잘 아는 세상의 일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님만해민 한복판에 가고 싶다는 말은 했었으나 어디서 내려야 할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내릴 수 있었던 건 그녀 덕분이었다. 갑자기 멈춘 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녀의 뒤로 화려한 술집이나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의 간판을 보았던 것이다. 이곳이 님만해민이 맞냐고 묻자 그녀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엉겁결에 따라 내리자 우리가 지도상으로 확인했던 바로 그 자리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도대체 운전사는 우리를 어디에 내려주려 했던 것일까. 그러나 의문은 뒤로하고 황급히 차비를 치러야 했다. 고층빌딩 한 채 없는 건 구시가지와 마찬가지였지만, 님만해민의 호황은 그새 소박해진 우리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타논 님만해민’이 주축이 되는 이 지역의 건물들도 구시가지와 세월의 흔적 면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찬 현대적이고 세련된 매장은 나이가 무색한 젊고 밝은 꿈을 꾸고 있었다. 골목도 어둡긴 했으나 라이브 클럽이나 고급스러운 식당이 한두 집 건너 하나씩은 나타나곤 했다. 구시가지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고, 방콕에서 우리가 들렀던 어느 곳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오히려 젊음, 생기, 유행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도 할 수 있었다. 치앙마이에 유수의 대학이 많기 때문일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청년과 아저씨 사이에 끼어있는 나와 D가 움츠러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퇴근 후 정장을 입고 대학가에 놀러 갔을 때의 어색함과 조금은 비슷하달까. 하지만 님만해민 도로를 따라 이스틴 탄 호텔 앞에 조성된 싱크 파크까지 갔을 땐 짧은 치앙마이 체류 기간 동안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후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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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 파크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공방, 상점이 모여있는 공원이자 상가였다. 젊은 아티스트와 사업가들이 모인 협동조합 같기도 했다. 간결한 선의 미학을 뽐내는 건물들이 미로처럼 들어서 있고, 그 한가운데엔 수백 년은 살았을 것 같은 거대한 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일면 자연을 향한 폭력으로 보일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나뭇가지 가득 달린 전구 장식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은 몹시 환상적이었다. 내가 지금 하늘을 떠받친다는 전설 속 세계수나 작은 요정이 사는 생명의 나무를 실제로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먹고 마시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기념품이나 선물로 제격이었을 소품은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이 한 장면을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거대한 나무는 초연해 보였다. 인간은 입을 딱 벌리고 나무를 우러러볼지 몰라도 그 거목은 인간사에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으며 존재를 계속할 뿐이었다.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밑동 주변을 뛰어다녀도 묵묵히 바람에 잎 한 번 흔들고 말았다. 나는 그 초연함이 좋았다. 어쩐지 인간이 나무를 짝사랑을 하는 것 같아 아련하기도 했다. 공존이란 말보단 의존이란 말이 더 어울렸고, 그만큼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이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증거와 상통하는 것 같아 마음이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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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즐기기 위해 신시가지에 왔으나 어느새 기분이 평평해졌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것 같다는 어색함도, 또한 갑자기 찾아온 평온함도, 우리가 바랐던 지점은 아니었다. 다시 한참 길을 걸어 다양한 맥주를 파는 펍에서 한숨을 돌렸다. 지척에 있는 나이트클럽은 충혈된 네온사인과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고급차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걸음의 방문자들로 눈에 띄었지만, 그 역시 우리가 바라던 장소는 아니었다. 디제이까지 고용해 음악을 틀어주는 펍에서 우리는 조용히 맥주 한 잔 씩을 마셨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겐 우리처럼 밤을 불사르려는 목적이 없었다. 그저 테라스에 앉아 친구, 연인, 사업 파트너와 대화하며 여름밤을 보내려는 여유 있는 이들이었다.



이쯤에서 나와 D 둘 모두 구시가지가 그리워졌다. 이곳에 더 머물렀다간 저 세계수의 일부가 되어 말간 평안을 얻을 것만 같았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치앙마이까지는 제대로 즐겨보자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여행자의 거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애써 먼 길로 둘러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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