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자수도 배운답니다.
"엄마, 뭐한다고 전화를 이렇게 안받노?"
"아, 캘리그래피 수업 다시 시작했다. 수업받는다고 무음으로 해놨지."
코로나로 인해 6개월 동안 닫혀 있었던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가 다시 열렸다고 했다. 작년, 퇴직 전에 아빠 손에 이끌려 시작한 억지로 시작한 골프와 달리 퇴직 이후 탁구와 캘리그래피, 수채화 그리기 수업에 자발적으로 나가서 배우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3월 코로나가 터지며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가 닫았기도 했고, 암 확진을 받아 암투병을 시작한 외할머니의 보호 및 요양 때문에 어딜 다니기도 여의치 않아 모든 배움과 활동이 잠깐 멈춘 터였다. 여전히 코로나 확진자 수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긴 하지만 지난 6개월간 굳게 닫혔던 커뮤니티 센터가 조금씩 열기 시작했고 할머니의 암 수술도 잘 끝나 부산으로 다시 내려가셨기에 엄마는 다시 정년퇴직 후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엄마는 40년 동안 군부대에서 근무하셨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군수사령부의 순기 업무(예산, 소요, 중기계획)를 구축하고 지원해주는 일, 즉 군부대에 필요한 군수 물자와 장비를 지원해주는 행정일을 하셨고 그냥 쉽게 말하면 군무원이셨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이따금씩 회사에서 다 끝내지 못한 일들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마무리하시곤 했다. A4 용지의 한 4~5배 정도는 되는 길고 큰 종이에 빼곡히 가득 찬 엑셀 표에 자를 대어가며 숫자를 확인하고 밤늦게까지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이었다. 진급을 위해 한참 공부해야 할 나와 오빠보다도 더 열심히 독서실에 가시며 공부를 하시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엄마는 내가 학창 시절, 단 한 번도 아침을 준비하지 못하셨다거나 소풍 등 도시락이 필요할 때 도시락을 싸주지 않으신 적이 없다. 늘 새벽같이 일어나 반듯하게 썰린 김밥을 싸 주셨고 김밥은 죽여주게 맛있었다. 내가 더 어렸을 때는 매일같이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으면 좋겠는지 적은 짧은 편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출근하시기도 했다.
엄마는 작년 정년까지 다 채운 후 퇴직하셨다. 나는 엄마가 퇴직을 하는 그날, 퇴임식에 가서야 엄마가 갓 스무 살 초반부터 일을 하기 시작하셔서 40년 동안이나 군부대에 몸담았으며, 서기관이라는 직급과 4급이라는 높은 계급으로 명예롭게 퇴직하셨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엄마와 함께 일하셨던 동료분들이, 부하 직원들이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이야기를 해 주셨고, 나는 바보 같게도 그제야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학교에 자주 오는 엄마보다 입학식에, 졸업식에만 올 수 있었던 우리 엄마가 만 배는 자랑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엄마와 사사로운 것까지 대화를 시작한 건 20살이 지나서였다. 대학을 서울권으로 가게 되면서 혼자 살기 시작했고 그 덕에 엄마와 더 애틋해졌다. 혼자 사는 외로움과 멈출 줄 모르고 나에게 흘러 들어오는 불안한 감정들은 숨긴 채 하는 통화였지만 하루의 마감을 짧게나마 엄마와 마무리하는 시간들이 좋았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하루를 보냈을지라도 "응, 잘 있었지! 밥도 잘 먹었지! 당근이지!" 라며 웃으며 통화를 하고 나면 정말로 괜찮아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이 쌓여 엄마와 나의 관계를 더 단단하고 애틋하게 했던 것 같다.
엄마와 이렇게 가벼운 일상 이야기만 하다 무겁고 깊은 대화를 하게 된 것은 친할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치매가 오시며 요양원에 가시면서부터이다. 사람을 갉아먹는 병이 오면 주변 사람들도 갉아 먹힌다. 어느 집이나 그렇듯 친가 쪽에선 작은 갈등들이 일어났고, 엄마는 그 갈등에 의견을 내놓기에는 타인의 가족이었다. 나 또한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나는 결국엔 어른들 입장에선 어린 자식이었고, 가족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과 사회적 시선, 도덕적 윤리 등의 문제에 함부로 말을 더 얹을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갈등이 있을 때면 엄마와 나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러 밖으로 나섰다.
그때 엄마와 했던 이야기는 내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늙음과 죽음, 존재론적 고독에 대한 두려움. 가족이지만 지켜야 하는 선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없는 대화들의 소모전, 그것으로 부터 오는 지치는 마음과 포기로부터 오는 죄책감. 사람답게 죽을 권리와 죽음 그 자체. 만약에 라는 가정을 두고 엄마는 그냥 보내달라던 대화들. 엄마와 나 사이에 오가는 대화와 그 사이의 숨들은 이전에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들과는 그 결이 다른 것들이었고, 나는 그 날 이후 엄마와의 관계가 더욱더 견고해졌다고 느꼈다. 엄마는 그때 퇴사를 하면 요양복지사 자격증을 따서 나의 엄마는 내가 보살피겠다고 했었고, 엄마는 정말로 퇴직과 함께 요양복지사 학원에 등록하고 자격증을 땄다.
엄마는 다시 캘리그래피 쓰기를 배운다. 수채화 그리기도 배운다며 스케치북과 연필, 물감을 사더니 이내 종종 사진을 보내왔다. 며칠 전 통화에서는 프랑스 자수도 시작했단다. 라식 수술 이후에도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못 보시기에 앞이 안 보여 어떻게 하냐 물었더니 돋보기안경을 쓰고 하신단다. 괜스레 코 끝이 찡해졌다. 평생 일만 하다가 갑작스레 퇴직을 하게 되면 중년의 우울증이 올 수 있다는 말들을 여러 차례 들었었고, 또 같은 군무원이지만 조금 일찍 퇴직을 한 아빠가 일을 안 하니 못 견디겠다며 다시 일을 시작한 것을 보며 엄마의 퇴사에도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이것저것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괜스레 "만다고 그렇게 뭘 많이 배우노? 프로 취미러네 울 엄마"라고 했더니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손을 많이 움직여야 치매 안 걸린대서. 손을 좀 쓰고 계속 움직이려고."
나는 더 이상 '왜'냐는 질문도, 멋쩍게 가벼운 농담도 하지 못했기에 엄마가 캘리그래피를, 프랑스 자수를 정말 '배우고' 싶어서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엄마가 엄마 자신을 위해서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계시는 건지, 아니면 여전히 '엄마'이기에 하고 계신지 말이다. 나는 얼마나 나이가 들고, 얼마나 성숙해지고, 얼마나 어른스러워지가와 상관 없이 나는 절대 엄마를 따라갈 수 없다. 나는 나의 엄마 만큼의 엄마가 될 수 없어서 엄마가 될 자신이 없다. 나는 엄마가 나의 엄마여서, 바다 같은 엄마여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엄마여서 너무 자랑스럽고 또 마음이 슬프고 아프다. 나는 그냥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