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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리너 Mar 15. 2024

꽃봉오리의 힘

“여행을 계획하는 순간부터 이미 여행은 시작된 거죠.”

여행을 좋아하는 후배가 이야기했다. 

MBTI의 J 형인 나는 여행을 간다고 하면, 먼저 숙소와 교통편을 해결한다. 여행 출발 시각부터 가는 길에 들를 휴게소나 마트 그리고 여행지의 맛집, 카페까지 핸드폰 메모에 적어놓는다.

여행지 주변에 박물관이나 미술관 혹은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서 볼거리의 맛도 탐색해 놓는다. 맛집 사이트에 들어가서 메뉴 사진을 보며 맛을 상상해 보는 것과 같이.

즉흥적으로 떠날 때는 이 과정이 상당히 압축된다.

학창 시절 소풍 가기 전날 설렘이 최고조에 이르듯이.

불타는 금요일이 직장인들에 가장 큰 해방감을 선사하듯이. 토요일 -> 일요일에 이를수록 주말에 대한 감흥은 떨어진다. 결혼식 전, 청첩장을 고르고 문구를 정한다. 드레스를 선택하고, 신혼여행지를 결정한다. 웨딩촬영에서 몇 번의 드레스를 입어 보며, 빛나는 순간을 남긴다. 예식을 준비하며 받는 격려와 축복 가운데 지인들의 소중함을 느낀다. 준비하는 순간들이 결혼식 당일보다 더 설렌다. 결혼식은 오케스트라 연주와 같다. 오랜 기간 준비, 연습한 모든 악기가 동시에 연주된다. 예상하지 못한 하객들과의 만남도 유쾌하다. 작은 실수가 있어도 웃어넘길 수 있는 흥겨운 날. 쾌청한 날씨까지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삶에서 절정은 순간이다. 절정으로 가는 과정은 길고 지난할 수 있다.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더 오래 설렘을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금어초 씨앗 심고 78일 차. 처음 씨앗 발아의 기쁨을 알려준 브니엘(금어초). 그동안 매일매일 작지만, 꾸준히 성장을 보여주었다. 떡잎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이토록 무성한 초록빛을 비추고 있다. 그중엔 발육이 더디다 슬픈 안녕을 고하는 새싹이 들도 있었다.


2월 중순부터 그로로팟 3기 동기들이 신비로운 꽃소식을 전했다.  한쪽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처럼 조바심이불쑥 찾아왔다. 

우리 집이 발화(發花)까지 하기엔 햇빛이나 습도가 적당하지 않은 것일까. 온도계를 초조하게 쳐다보았다. 물을 너무 많이 혹은 적게 준 걸까? 분갈이를 더 해야 하나. 의문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재빠르게 조언을 준 친절한 식집사동료들 덕분에 화분에 흙을 채우고, 뿌리를 관찰했다.

잊고 있던 영양제도 챱챱 뿌려주었다.

꽃이 피는 순간이 아닌, 꽃봉오리를 보는 순간부터 내 마음에 꽃은 찾아왔다.

6개의 겹겹이 맺힌 꽃봉오리는 기대감과 보람,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반복되는 낡은 청바지 같은 일상에서 찾기 어려운 것들이다.     

브니엘, 친구의 농원 그리고 평안함을 떠올리게 하는 그 이름처럼. 브니엘의 꽃봉오리는 마치 엄마의 젖가슴처럼 보드랍고 탄력 있게 일주일째 맺혀있다.

그로로에서 제공한 투명한 화분을 손으로 들어보니, 잔뿌리가 제법 많이 뻗어있다.

주말엔 새집으로 이사해야겠다.     

꽃봉오리를 볼 때마다 가능성을 본다. 모든 씨앗이 꽃이 될 수 있다는.

나 자신과 그리고 주변의 많은 이들이 꽃봉오리로 남아있다. 꽃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을 믿고 있다. 브니엘과 함께 시작한 여행이 어디로 날 이끌지 궁금하다.

꽃봉오리로 아름다운 브니엘, 꽃이 갖지 못한 기대와 희망을 선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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