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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의 방을 엿본 후(7)

by 베를리너

거실에 나와보니, 인기척 없는 동혁의 방문이 살짝 열려있다.

“미안하지만, 잠깐만, 방 구조 좀 볼게….”

난 허공에 대고, 주인 없는 방에 허락을 구했다.

키보드를 건드리자, 어둠 속 화면이 불 밝힌 듯 켜졌다. USB는 여전히 꽂혀있었다.

화면에 나타난 건 이해할 수 없는 암호화된 문서. 또 다른 창에 독일어로 된 메일이 열려있다. 수신인은 독일 정보부, 메일은 단 몇 줄로 이루어져 있다.

“ *월 *일까지 북한 고위급 인사 AAA의 연락처와 러시아 방문 일정 체크”

이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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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돼 개에게 물린 적이 있다. 깊은 숲 속에서 산책할 때면, 잘 훈련된 개들이 줄 없이 주인 곁을 따라다녔다. 호랑이만 한 개들이 내 옆을 스칠 때 긴장했지만,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집에 가까워 마음을 놓은 순간, 쥐새끼만 한 개가 나를 향해 돌진하더니 복숭아뼈 있는 곳을 ‘앙’ 무는 것이 아닌가.

작은 개 에게 물려 쓰러져 울 수 없었다. 주인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기숙사에 돌아오니 다른 한국유학생이 개에게 물리면 비자가 연장된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충고를 건넨다. 외국인 신분인 유학생은 작은 사건도 체류와 허가증인 비자와 결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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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함께 살고 있는 룸메이트가 북한 사람이라니! 이건 개에게 물린 것과 차원이 다르다.

난 기가 막힌 현실에 웃음도 울음도 나지 않아 창밖을 힘없이 바라봤다.

어라. 아까 쓰레기 분리 수거하러 나갈 때 봤던 남자가 아직도 서성이고 있다. 이메일, 북한, 암호 같은 컴퓨터 화면 그리고 나타난 수상한 남자.

난 커튼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왜 방을 세놓은 거야.

‘위험도 나누면 반이 되는 거냐고?’

머릿속에 가득 찬 물음들에 혼란스럽다.


핸드폰이 울린다.

“뭐 해? 반제 갈래?”

멜라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들으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복잡한 마음은 벌써 반제 호숫가에 벌렁 드러누웠다.

지난번 멜라니와 그녀의 남친 앤디와 그곳에 가기로 했었다.

베를린엔 어느새 초록이 길을 터고 있었다. 그건 기말고사로 향하는 시계가 전속력으로 달려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악명 높은 통계학 시험-유학 기간을 고무줄처럼 늘여놓는 그 시험 -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벤의 응원을 받았지만, 마음속의 부담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다.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가게를 내놓기로 했다.”

아버지의 메일을 읽으니, 끝을 알 수 없는 유학 기간이 나를 짓누른다. 친구는 몇 년 고시를 준비하다 취업했다. 신물 나게 공부했던 그녀가 커피 타는 일부터 시작했다는 사회생활 넋두리도 내겐 부럽게 들렸다.


차 안에서 멜라니에게 물었다. 혹시 동혁에 대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혹시 동혁 알아?”

“지난번 그룹 과제 했는데, 컴퓨터는 꽉 잡고 있던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동혁은 컴퓨터 전문가였다. 예상 못 한 그녀의 답변에 머릿속 회로는 엉켜버렸다.

북한 유학생, 컴퓨터 전문가, 독일 정보부의 메일.

난 어디로 이사 온 걸까? 차가 비포장도로 위에서 덜컹거리자, 불안감이 나를 흔들었다.

앤디가 몰고 온 차는 반제호수 앞에 멈춰 섰다.

어스름이 덮인 호수는 달빛 아래 숨죽이며 자태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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