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앤디는 안 와?”
약속 시간 다 돼서 앤디가 못 온다고 했다.
독일인들 시간 약속 철저히 지키는 거 아녔어?
가끔 전형적이지 않은 독일인들 발견한다. 맥주는 입에 대지도 않거나, 축구는 관심 밖이거나, 여행은 질색인 집돌이, 집순이. 그럴 때마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재미있었다.
앤디가 막상 약속 시간 직전에 펑크 내자, 김이 샜다.
“오늘은 확실히 가는 거야?”
“당연하지!”
“새로 이사 간 집 주소 알려줘.”
머릿속 생각을 털어내는 데 자연치료가 최고다.
지난번 일이 미안했던지, 앤디는 멜라니와 함께 차를 몰고 집 앞으로 왔다. 또 다른 커플 제시와 필립도 함께다. 사랑이 꽃피는 두 커플과 함께 환경공학을 공부하게 된 나는 성적도 꽃 필 것인지?
벌써 바깥은 어둑해졌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반제호수가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길이 익숙한 듯 네 명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는다. 이들이 향하는 비밀장소는 어딜까? 난 그 뒤를 따라 하염없이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이 끝이 다다르자, 인적이 드문 아름다운 호수가 펼쳐졌다.
난 풀밭에 아무렇게나 앉아 멍하게 호수를 바라봤다.
머릿속에 ‘북한’이라든가, ‘비자’ 같은 복잡한 생각이 떠오를 때면, 독일 친구들이 알려준 방법을 썼다. 즉, 머릿속에 “차단‘ 버튼을 하나 만들어 꾹 누르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비우는 훈련이었다.
그런데, 호수가 우리를 집어삼킬 듯 푸르고 검은 속내를 드러내자, 앤디가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 적응하지 못한 독일 문화가 있었던 걸까?
늘 의아했던 건 밤마다 독일 텔레비전에서 나체가 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일부러 이상한 프로그램을 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게 바로, 그렇게 많이 들었던 '자유로운 몸 문화'(FKK;Freikörperkultur 에프카카)인 걸까?
필립과 제시는 옷을 벗을 생각은 없는 듯 하지만, 표정만큼은 자연스러웠다. 멜라니도 주저함 없이 옷을 훌렁 벗더니, 호숫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깊은 숲 속이라 조명은 없었지만, 달빛 아래 숨 막히는 실루엣이 어른 거렸다.
난 침을 꼴깍 삼켰다. 이상하게도 에로틱한 분위기는 전혀 없고, 옷 벗고 첨벙거리는 애들이 마냥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나도 어릴 적에 저렇게 놀았던 거 같은데.
난 어색함을 감추려 핸드폰을 꺼냈다.
어랏, 동혁의 문자가 와있다.
“주말에, 집 앞 카페에서 과제 이야기 좀 할까?”
집 놔두고 카페는 왜? 커피값은 각자 내는 건가? 그러고 싶지 않은데, 머릿속엔 통장 잔액의 초라한 숫자 가 떠올랐다.
고요한 숲 속에서, 오직 첨벙이는 물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가끔 독일 애들의 넘쳐나는 체력이 버겁게 느껴졌다. 나는 수영을 한 것도 아닌데, 밤이슬이 차갑고 피로가 몰려왔다.
‘집에 가고 싶어!’ 여기에도 전철이 있다면 좋을 텐데. 멜라니와 앤디가 언제까지 나체 수영을 즐길 셈이지?
나도 언젠가 완전히 독일화 되면, 저들처럼 나체 수영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부끄럽고 신경 쓰이는 게 너무 많지만. 사람 일은 모르니까. 어쩌면 어느 날 호수가 폭신한 소파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날을 위해 기억해 둬야겠다. 반제호수.(Wanns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