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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천사의 시(9)

by 베를리너

반제 호숫가 풀숲에 드러누우니, ‘독일인 정체성’이 깨어나는 듯하다. 해만 보이면, 학교 풀밭, 공원에 벌렁 누워 멍 때리는 독일인들처럼 말이다.


“얼마 안 있으면 생일 아냐?”

제시가 묻는다.

“벌써!” 생일이 다음 주 주말로 훌쩍 다가왔다. 독일에선 생일 전날 밤부터 모여 자정이 되면 축하가 시작된다. 자정 땡 파티! 라 해야 하나. 지난번 생일 다음 날 멜라니에게 ‘생축!’ 이랬더니 분위기가 싸해졌었다. 독일에서 생일이 1분이라도 지나면 축하는 금물! 이라나. 합리적인 독일인들에게도 ‘불운’은 금기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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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앞에 닥친 통계학 시험 걱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순간 제시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 그때 벤도 볼 수 있겠지. 흠, 얄미운 리자는? 미운 놈 떡 하나 준다고 했던가?

생일 초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지우느라 머릿속이 분주하다.

9평짜리 작은 기숙사 방이 곧 시끌벅적해질 걸 생각하니, 설레기 시작한다. 근처 노래방도 예약해 둬야겠다. 내 생일엔 노래방에 가는 게 독일 친구들에게 공식처럼 돼버렸다.


“난 여기서 내려줘. 굳이 차 돌릴 거 없이”

벤에게 말하고, 광장에서부터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후드득 소나기가 한두 방울 쏟아지더니 금세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진다.

비가 오니, 동베를린의 회색 건물들이 음침하게 느껴졌다. 모자를 뒤집어쓴 독일인들의 표정도 덩달아 어둡게 느껴진다. ‘나 건들지 마. 기분 엉망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같은 길을 몇 번이나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부터 충전이 덜 된 핸드폰 배터리는 깜빡이다 결국 명을 다했다.

제발 집에 가는 길에 기분 나쁜 누군가에게 걸려들어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유학 초기에, 내가 타고 있던 버스 유리창을 누군가 밖에서 강하게 내리친 적이 있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중학생쯤 되는 남자애가 눈앞에서 씩 웃었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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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었어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천사가 나타난 걸까?

얼마나 헤맸는지, 빗속이건 말건 상관없이 주저앉고 싶은 그때. 하늘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갤 들어보니 동양인이다. 뭐야? 이 동네 사는 동양인들은 왜 이렇게 독일어를 잘하지?

마음이 놓인다. 검은 테 안경 속 눈매가 선해 보인다.

“아, 혹시 슈파 스트라세 13번지가 이쪽인가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놓인 나는 하늘이 보내준 지푸라기를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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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한국 유학생이세요?”

그는 나에게 물었다. 비 맞은 생쥐 꼴로 길 잃은 난 금세 정체를 들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웃는다. 핸드폰으로 구글맵을 켜더니 주소를 알려준다.

“어디 학교 다녀요?”

“베를린 공대요”

그러고 보니 그만 연이어 질문했다.

“이름이 뭐예요?”

“요나스”

그의 이름이다. 미소 대신 그의 대답을 들을 기회였다.

독일 이름을 가진 한국 사람?

비 오는 날 주먹으로 창문을 내리치던 소년 대신, 핸드폰을 빌려준 한국 사람을 만났다, 요나스.

추억은, 다른 추억으로 잊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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