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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positive@aaa.de(10)

by 베를리너

지난주 통계학 시험 후, 학과 사무실에 들렀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리자와 벤이 대화에 빠져있다.

“주말엔 일하느라 바빠서, 르네 집들이엔 못 갔어!”

“일 끝나고 오지!”

“요즘 회사에 일이 많아서, 빠질 수가 없어. 생활비랑 다음 학기 때 스페인 대학 에라스무스 학기 (교환학생) 가려면 열심히 벌어야지!”

리자의 얼굴엔 자신감이 빛난다. ‘나처럼 과친구에게 독일어로 쓴 리포트를 교정 부탁 할 일 없겠지.'

부모님으로부터 일찌감치 경제적으로 독립한 리자의 눈은 ‘혼자서도 잘해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녀 앞에서 난 어린애같이 느껴지곤 했다.

“안녕, 오늘 통계학 시험 결과 나왔는지 궁금해서.”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다잡고 간신히 물었다.


“아! 좀 이따 수업 시간에 알려줄 거야.”

리자는 나를 흘깃 보더니, 벤에 얼굴 돌린 채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전형적인 베를리너린(베를린 여성)처럼 직선적이고 명료한 답변이 차갑게 느껴진다. 움츠러든 채 사무실을 나왔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벤의 안타까운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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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문에 붙은 공지문에서 내 학번을 찾았다.

‘불합격’

시험을 본 후 근거 없이 기분이 좋을 때가 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정량 통계학 시험을 위해 수학 공식을 암기하고, 계산기까지 동원해 문제를 풀었다. 고등학교 때 과감히 ‘수포자’가 된 나는 수학 대신 영어와 국어에 올인했었다. 그 수학 공식이 독일까지 따라올 줄이야.

과 친구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하고 자신감이 붙었는데. 미리암 세바스티앙과 함께 공부하고, 벤의 도움도 받았건만, 뭐가 문제일까?


수학과 건물 카페에선 우울할 때 마시면 딱 좋은 밀크커피를 판다. 따뜻한 우유가 듬뿍 들어가 부드럽고, 고소한 커피콩향이 나는 그 커피가 오늘따라 유난히 간절했다.

카페에 내려가니, 패잔병처럼 시험에 떨어진 과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어휴, 이번 시험 난이도 최상 아니었어?”

“통계학 난이도는 원래 최고야.”

“다음 학기 재수강할 거야?”

“졸업 필수 과목인데, 별 수 있냐?”

친구들은 비슷한 속내를 꺼내 늘어놓는다. 끝 앞에서 시작을 이야기하지만, 도무지 기운이 안 난다. 이번에 붙었으면 간단한 일인 것을.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시험이 이런데 졸업이 가당키나 한 그림일지. 또다시 내 안에 의심의 강풍이 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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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암이 들어와 뽀송뽀송한 토끼가 그려져 있는 엽서를 공중에 흩뿌렸다. “즐거운 주말!”이라며 손 키스를 날린다. 카페에서 무료로 배포되는 엽서 위에 미리암의 긍정에너지가 배어있다. 이메일 주소가

thinkpositive@aaa.de 인 것도 미리암답다.


이번 주말은 내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다. 친구들에겐 이미 초대 메일을 돌렸다.

생일파티도 여행처럼 당일보다 전날이 더 설렌다.

막상 생일이 오면, 결말을 알게 된 영화처럼, 시시해지는 기분이다. 생일 전까진 얼마든지 기대하고 설레도 된다.

이사한 집을 모르는 친구들을 위해, 직접 그린 약도를 메일에 첨부했다.

동혁도 초대할 예정이다. 생활 리듬이 달라, 집에서 마주친 지 꽤 됐다. 요즘은 방에서 들려오는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나 현관문 여닫는 소리로 그의 흔적을 듣는다. ‘오든 안 오든’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그가 좋아할 만한 한국 음식과 노래를 고르느라 분주하다. 음악은 파티 분위기를 좌우하니,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쌀 5kg을 번쩍번쩍 들고 다니다 보니, 장보기 근력이 생겼다. 생일 메뉴는 일찌감치 정해놓았다.

잡채와 소불고기 그리고 김밥. 독일 친구들은 잡채 면을 유리면이라 부른다. 투명하다며! 이름까지 예쁘고, 단짠단짠 한 맛에 모두 폭 빠져있다. 짭짤한 감자칩, 음료 그리고 맥주도 카트에 담았다.

맥주 한 병들고 밤새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독일 친구 보면 참 신기하다. 물론 말없이 홀짝거리는 친구들도 있다. 억지로 즐겁게 보이지 않아도 되고, 각자 자기 방식으로 파티에 섞인다. 맥주병을 든 채, 자유롭게 웃는 독일 그들을 보면,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착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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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한쪽에 정성껏 만 김밥을 쌓아놓고, 잡채에 귀한 참기름을 아낌없이 뿌렸다. 불고기 간도 여러 번 봤다.

‘딩동’

첫 번째 손님이 벨을 눌렀다. 집안에 가득 찬 음식 냄새 때문에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아뿔싸!’ 현관문 앞에서, 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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