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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카드에 숨긴 것(11)

by 베를리너

“왔어?”

1등으로 도착한 벤. 수줍게 내민 선물에 눈길이 갔다.

‘로운, 생일 축하해!’

하얀 도화지에 자신이 손수 그린 그림과 축하 메시지가 적혀있다. 초등생 시절 숫기 없는 남자애가 내민 생일 카드를 받던 때가 떠올랐다.

“고마워! 잘 그렸네.”

나는 그때처럼 기뻐하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순수한 독일 청년은 볼이 발그레한 채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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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들어오는 일레나와 남자 친구. 일레나는 우리 과 최고 미녀다.

낡은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에도 굴욕감 없이 당당하고, 남극에 떨어뜨려도 잘 살 것 같은 독립적인 독일 여자애들 사이, 목소리와 외모가 여성스러워 특별하게 느껴지는 친구.


“우리 애도 활발한데 독일 유치원엘 갔더니, 독일 여자아이들의 발랄함에 묻히더라고.”

신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유학생 선배가 말했었다. ‘여성적이다’라는 말은 모르고 자란 독일 여자애들 사이, 다소곳하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지닌 나는 모래알처럼 느껴지곤 했다.

일레나의 남자 친구 미카엘은 잘 나가는 IT 회사에 다닌다. 일레나가 돋보이는 이유다. 학생이 아닌 직장인을 만나는 그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생일 축하해” 라며, 악수 청하는 미카엘의 웃음이 매력적이다. 역시 일레나를 차지할 만하다.

“일레나, 남자 친구 퇴근하고 온 거야? 멋져.”

“응... 그런데 곧 그만둘 거야. 회사에서 나가래.”

“뭐?”

독일인들은 큰일이 벌어져도 아무것도 아닌 듯 말한다. 오토바이 사고가 난 아버지를 두고 “아이고, 대단하셔!” 라든지. 반어법은 두려움에 경직된 생각을 풀어주는 것 같다.

정리해고된 남자 친구와, 생일파티에 오는 것을 보면, 이 또한 삶의 일부라 받아들이는 건가.

일레나는 노래방에서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이란 곡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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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과 이야기를 나누는 리자에게 다가갔다.

“알렉산더 잘 지내? 같이 안 왔어?”

리자의 남자 친구 알렉산더는 졸업 필수과목인 경험적 사회학 강의를 맡고 있다. 이 과목 역시 큰 장애물이다.

“ 많이 바빠. 지난 주말 여성공동체 ‘루트’에서 워크숍 했는데 왜 안 왔어? 젠더 사회학 교수님이 추천한 행사인데.”

“나도 초대된 거야? 몰랐어.”

“전체 메일 못 받았다고?.”

리자는 피식 웃었다.

당당함이 넘치는 리자랑 이야기하다 보면 난 왜 작아지는 건지. 벤에게 도움 받는 것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다.

‘남자 친구 과목이 너무 어려워. 잘 좀 얘기해 줘.’

물론 속으로 이야기했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친구들은 ‘5,4,3,2,1’ 초를 세고, ‘생일 축하해’ 라며 잔을 부딪혔다.

그제야 동혁이 빈손으로 기숙사 방에 들어온다.

“함께 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니야?” 능청맞게 한마디 거든다. 김밥을 권하니 몇 개 집어먹는다. 내 친구들 속에 섞여 있는 모습을 보니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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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한 파티가 끝나자 날 반기는 건 수북이 쌓여있는 설거지와 방 여기저기 나뒹구는 빈 병 들이다.

난 한숨을 내쉬며, 방을 치웠다. 책상 위 벤의 카드가 보였다.

카드를 넓게 펼치자, 안쪽에서 명함 하나가 뚝 떨어졌다.

카드엔 탈라(Tala)라는 카페 명함이 끼어있다. 뭐지? 명함 뒤엔 약도가 그려져 있다.

여기 오란 말인가? 이곳에서 선물을 준비했다는 건가?

그림 카드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던 거다.

아까 벤과 나눈 작별 인사가 떠오른다. 한쪽 눈을 찡긋했던.

‘이제 알았구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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