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여니, 하얀 종이봉투가 바닥에 놓여있다. 머릿속 회로는 정지상태, 솔솔 풍기는 달콤한 냄새에 허겁지겁 포장을 푼다. 갓 구운 듯 사과 과육이 쏙쏙 박힌 케이크가 놓여있다.
‘시험 잘 봐. 벤’
몸을 휘감은 감기 바이러스가 사라지는 것 같다.
내 주소를 어떻게 알았지? 멍한 머릿속 실습과제 신청서에 적어낸 주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그보다는 깜짝 선물을 들고 온 벤에 대한 감동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사과 케이크 때문인지 다음날 거뜬히 등교할 수 있었다.
환경공학 생태학 강의실, 강의실은 영화 ‘굿윌헌팅’에서 본 강의실처럼 맨 아래층 강단부터 한 층씩 높아지는 계단에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다. 뒷문으로 들어오면 눈에 띄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비 오는 아침, 우산도 쓰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독일인들을 제치고 총총걸음을 옮긴다.
보슬비에도 우산을 챙겨 쓰는 날 신기하게 쳐다보는 독일인들.
“왜 우산 안 써?”
“난 설탕이 아니야.” 썰렁한 농담에 어느새 익숙해졌다. 나도 웬만한 가랑비엔 우산 대신 모자티를 쓴다.
살그머니 빈자리 아무 곳에 가방을 던져 놓고 앉았다.
앞에 걸어 들어오는 동양인 남자 어디서 봤나 했는데. 이번에 이사한 기숙사 방주인이다. 짙은 감색 점퍼를 걸치고, 검게 그을 린 얼굴에 독일인처럼 ‘세상 나 혼자 산다.’라는 표정이 얼핏 보면 독일인과 구별하기 어렵지만.
‘같은 학교 학생이었어?’
“좋은 아침!”
남자를 보며 복잡한 생각이 들 때 나를 툭 치는 멜라니.
나만큼 아담한 체구에 조곤조곤 말하고, 잘 웃는 멜라니. 그녈 보면 베를리너린(베를린 여성)의 직선적이고 차가운 이미지가 사라진다.
“로운, 과제 짝은 구했어?”
정신이 든다. 중간고사 그룹 과제로 베를린의 신재생 에너지 시설을 조사해야 한다. 멜라니는 남자 친구인 앤디와 함께 하기로 했다고.
“이 수업 들어요?”
한참 전부터 지켜봤던 나와 달리, 이제 나를 발견한 그는 깜짝 놀란 듯 말을 걸었다.
“이사 잘했어요? 멀진 않아요?”
“버스 타고 왔어요.”
“네. 전철도 가능해요. 한 번 갈아타면 돼요. 체크포인트 찰리까지.”
"혹시 과제 파트너 구했어요? 나와 같이할래요?”
난 쭈뼛거리며 물었다.
무슨 용기였는지. 이 강의실에서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무언의 동맹을 믿은 걸까.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난 그의 대답을 응낙한다는 뜻으로 알고, 서둘러 약속을 잡았다.
베를린시의 지열 에너지, 바이오 가스 에너지, 태양광 에너지, 풍력에너지 중 한 곳을 방문해야 하는데, 독일어에 능한 그가 함께한다니, 마음이 놓였다.
“이름이 뭐예요?”
“동혁”
동혁?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즘 이름은 아니네. 그러고 보니 동혁의 행동이 약간 부자연스럽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도 그렇고.
집에 도착해, 컴퓨터와 프린터를 연결해야 했다.
침대를 등진 자리에 책상을 놨다. 컴퓨터와 프린터기 꽂는 콘센트를 찾아야 하는데. 딱히 좋은 위치가 아니었다. 다른 방은 어디에 놓은 거지?
거실에 나와보니, 동혁의 방문이 살짝 열려있다.
“미안하지만, 잠깐만, 방 구조 좀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