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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창 응봉 최중원 Nov 09. 2019

빈 집

1

도어락 비밀번호 1957을 누르고, 철현은 첫 번째 집으로 들어선다. 하얀 말티즈가 꼬리를 흔들며 방에서 뛰어나와 철현을 반겼다. 이름은 봄이. 11살이 다 되어가는 노령견이다. 하지만 눈물자국이 좀 있는 것 빼고는 건강한 친구다. 주인이 정성을 다해 키우기 때문이라는 것을 철현은 알 수 있었다. 사료는 언제나 최고급이었고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간식들이 너무 과하지 않게 제공되었다. 주인은 퇴근하고 나서 거의 매일 저녁에 짧게는 30분에서 한 시간씩 산책을 다녀왔다. 매주 수, 금요일 점심에는 애견 돌보미가 와서 봄이와 함께 한 시간가량을 놀아줬다. 정기적으로 병원도 다녔다. 

    철현은 문을 닫고, 신발을 벗어 정리한 다음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봄이의 북실한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봄이는 웬일인지 오늘 평소 때보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는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커다란 백팩은 어깨에서 내려 바닥에 두었다. 핸드폰으로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서 늘 듣는 재생 목록을 켠다. 아침에는 가벼운 재즈가 부담스럽지 않고 좋다. 이 시간에 오피스텔의 이웃들은 다 일 하러 갔기 때문에, 조금 크게 들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래대로라면 캡슐커피 머신으로 롱고 한 잔을 내려마실 것이었지만 왠지 오늘은 지금 이 소파 위에서의 늘어짐이 좋았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옆자리로 뛰어올라와 웅크리고 누운 봄이를 다시 쓰다듬으며 10분만 더 이렇게 있다가 하루를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이 곳은 철현의 집이 아니다. 이 집의 주인은 철현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자신이 출근한 사이에 매일 철현이 자신의 집에 머물다가, 퇴근하기 전에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주인은 알지 못했다. 이 집에 할당된 시간은 매일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이다.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철현은 또 다른 두 집에서 다른 주인들 몰래 머문다. 

    철현이 주인이 있는, 그러나 비어있는 집을 오가며 생활한 지도 벌써 이년이 넘었다. 곤궁해서 선택한 방법은 아니었다.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방 하나를 빌리고 월세를 낼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프리랜서였지만 일은 끊이지 않고 들어왔고, 들쭉날쭉하지만 수입도 계속 있었다. 그가 다른 사람의 집에 몰래 머물고 있는 이유는 조금 더 심리적인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던 소파에 앉고, 다른 사람이 사용했던 컵에 커피를 마시고, 다른 사람이 잤던 침대에서 자는 것을 편안하게 느꼈다. 다른 누군가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구축한 작은 세계에서 그 세계를 티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타인으로 머무는 것이 좋았다. 철현에게는 그 낯섦이 필요했다.


2

자신의 그런 특이한 성향을 철현은 우연히 발견했다. 일 년가량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헤어진 다음에 철현은, 그녀의 집에 자신의 물건들을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양말 몇 켤레와 속옷, 티셔츠, 그리고 당시에 읽고 있던 책 한 권이었다. 책은 별 볼일이 없는 추리소설이었지만, 이야기의 전개가 나름 흥미진진했다. 철현은 그 책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꼭 확인하고 싶었다. 여자 친구의 집은 그녀가 다니던 대학교 근처의 오피스텔이었다. 그는 그녀의 집 도어락 번호를 알고 있었고, 그녀의 이번 학기 시간표도 알고 있었다. 그리 나쁘게 헤어진 편은 아니었던 지라 그녀에게 부탁하면 자신의 물건들을 전달받을 수 있을 것이었지만 철현은 당분간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철현은 그녀가 학교를 가고 없는 시간을 틈타 조용히 그녀의 방에 들어가서 자신의 물건들만을 들고 나올 셈이었다.

    그런데 번호키를 누르고 전 여자 친구의 집에 들어갔을 때, 철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같은 집이었는데 뭔가가 달랐다. 침대, 책상,  의자, 부엌의 조리기구들은 그대로였지만, 놓여있는 물건들이 달랐다. 그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집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다.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듯, 한 편에는 풀다 말은 이삿짐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귀찮았는지 도어락의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 여자 친구는 다른 어딘가로 이사를 간 것이었다.

     철현은 처음에는 자신이 마저 읽지 못한 추리소설에 대해 생각했고, 그다음에는 여자 친구가 왜 이리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야 했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다음에 그는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새로운 세입자에게는 미안하지만 화장실을 쓸 수밖에. 

    세면대 위에는 면도기와 쉐이빙 폼, 그리고 남자용 세안 용품과 피부 관리 용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새로 이 곳으로 이사 온 사람은 남자였다. 아마도 전 여자 친구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 이리라. 철현은 가뿐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나와서 방을 둘러보았다. 책상과 하나로 연결되어 한쪽으로 솟은 책꽂이에는 전공 서적들이 가지런히, 몇  권의 소설들과 함께 꽂혀 있었다. 상법, 형법, 판례 해설 등등의 단어들이 금색으로 검거나 진초록의 책 등 위에 새겨져 있었다. 법대생인 모양이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책상에는, 지금 한창 읽고 있는 중인 듯 책갈피가 중간에 꽂혀있는 책 한 권만이 놓여 있었다. 철현은 얼른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이었으나, 그전에 집의 주인이 읽고 있는 것이 어떤 책인지만 확인하기로 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펼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책을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다음이었다. 원래 책 읽기를 좋아하는 철현이었으나, 그렇게 집중해서 앉은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어버리는 일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깜짝 놀란 그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책갈피도 원래 꽂혀 있었던 페이지에 꽂아 놓은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철현은 올라오는 한 젊은 남자와 마주쳤는데, 곧바로 그는 그 남자가 자신이 방금 전까지 머물렀던 방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잠깐이라도 그가 늦게 나왔으면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릴 뻔했다.     

  철현이 자신의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묘한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흥분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당황했다. 범죄 비슷한 일을 저지르고, 들키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현장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에서 나오는 스릴 같은 것인가? 아니면 스릴보다는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의 집에서, 그 사람 모르게 마음껏 (배변 활동도 하고, 책 한 권도 다 읽고. 이 정도면 ‚마음껏‘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하리라) 활개를 치다 온 것 자체가 자신을 들뜨게 한 것인가? 조금 전의 경험과, 그 경험에서 느낀 미묘한 흥분을 머릿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말이 되게 설명해 보려고 노력해 본 다음에 철현은, 그 어떤 설명도 쉬이 납득이 되지 않고, 무엇보다 충분히 변태적이라는 것에 약간의 좌절과 자기혐오를 느꼈다. 

    하지만 다음날 철현은 다시 그 집으로 향했다. 책상 옆에 붙어있는 강의 시간표를 이미 확인했었기에 그는 자신이 무슨 요일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그 집에서 들키지 않고 머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변수는, 과연 그 친구가 모든 수업에 빠짐없이 다 제시간에 출석하는지였다. 하지만 철현은 깔끔하게 정리된,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방의 모습을 보고 그가 무척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지각도 이 법대생에게는 용납되지 않으리라. 그 뒤로 한 달가량, 철현은 주말을 제외한 매일, 그 법대생의 집에서 낮을 보냈다. 법전을 제외한 모든 책을, 법대생의 책상에 앉아서 읽었다. 재미있는 책도, 재미없는 책도 있었지만 철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찬장에서 꺼낸 라면을 끓여 먹고, 졸리면 종종 침대에서 낮잠도 잤다. 설거지는 언제나 깨끗하게 했고, 라면도 자신이 먹은 것과 같은 종류로 다시 사다 채워 넣었다. 자고 일어난 다음에는 침대도 정리했다. 

    그 대학생 친구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되면, 철현은 집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자기의 흔적을 모두 치운 다음에 지하철과 버스를 한 번씩 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집은 비싸고 좋은 동네에 있었다. 같은 오피스텔이었지만 훨씬 넓고 방도 두 개짜리였다. 엘리베이터도 있었고, 14층 높이의 자신의 방에서는 한강의 야경도 볼 수 있었다. 가구도 더 좋았고, 이불은 더 푹신했다.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진 의자는 오래 앉아있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도 철현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집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불편하게 느껴졌다. 무엇인가가 비어있었다. 그는 모든 감각으로 느껴지는 결핍을 애써 무시하며, 노트북을 펼쳐서 쌓여있는 일들을 처리했다. 어찌 되었든 돈은 계속 필요했다.


3

방학이 되자 법대생 친구는 예전보다 더 오래 집에 머물렀다. 집을 나가는 시간도, 집에 들어오는 시간도 불규칙했다. 그래서 철현은 더 이상 그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그는 이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노트북을 들고 시내의 이곳저곳 카페로 나갔다. 하지만 카페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신의 공간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의 공간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하나둘씩 사 모은 물건들이, 물건과 물건의 틈새에, 가구와 가구의 틈새에 쌓여 있는 누군가의 사적이고 내밀한 순간들이 카페에는 없었다. 철현은 이케아도 여러 번 방문해서 수많은 작은 공간들로 구성된 쇼룸을 천천히 돌아다녀보았다. 책상 앞 의자에, 소파에 앉고 침대에 누워보았다. 하지만 역시 껍데기뿐이었다. 

    괴로운 순간들을 보내면서 철현은 다시 한번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았다. 자신의 집에서는 불편함을 느끼면서 타인의 집에서는 왜 그토록 평온함을 느끼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기억하는 처음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혹시 어렸을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부모와 자신의 관계 사이에 일종의 „씨앗“ 같은 것이 심어진 것은 아닌지, 그 씨앗이 지금 발아해버린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없었다. 철현과 부모님의 사이는 적당한 사랑과 적당한 의무로 이루어진, 평범하고 별 다를 거 없는 관계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두어 달을 지내다 보니 그의 증상은 점점 심해져서, 이제는 자신의 집에서는 도저히 잠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자신의 침대는 너무 푹신해서 자신의 몸이 끝도 없이 꺼져 버릴 것 만 같았고, 이불은 마치 물을 먹은 솜이라도 된 것처럼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받았던 일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근처의 호텔에서 하루 이틀 묵어 보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의 손때가 탄 사물들,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담긴 서랍들, 다른 누군가의 체취가 묻은 옷들이 가지런히 개여 있는 옷장들이었다. 소독약과 방향제 냄새가 나는 호텔 방, 세제의 향밖에 나지 않는 호텔의 하얀 이불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밤중에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잡아 타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모님은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방문에 놀랐지만, 금방 냉장고에 있는 이런저런 재료들로 늦은 저녁을 만들어 주었다. 엄마의 된장찌개는 여전히 맛이 있었다. 그는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집의 구조나 가구들은 철현이 학생 때 머물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의 자신의 방도 전혀 번한 것이 없었다. 자신의 짐이 치워진 책상과 옷장에 이제는 부모님의 물건들이 쌓여있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걱정하시는 부모님들을 안심시켜서 안방으로 들여보낸 다음에, 철현은 자신의 어두운 방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네모난, 익숙한 형광등이 달려 있었다. 언제나처럼 형광등 케이스 안에는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는 벌레 몇 마리가 죽어 있었다. 창문 바로 옆에 서 있는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 덕분에 그는 그것들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익숙했다. 부모님은 철현에게 타인이 아니었다.  이 방도 철현에게는 여전히 자신의 방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이 곳에서도 잠을 자지 못했다.    

사흘 넘게 거의 한 잠도 자지 못한 그는 결국엔 전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하루만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전 여자 친구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계속되는 철현의 부탁에 하루뿐이라는 조건을 명확히 하고는 자신의 새 주소를 알려줬다. 철현이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전 여자 친구는 그의 퀭한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진지하게 걱정하는 말투로 전 여자 친구는 따듯한 차를 한잔 건네주면서 물었다. 철현은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었고, 제대로 설명하는 것을 성공했다 한들 자신이 변태로 여겨지기밖에 더하겠는가.  

    전 여자 친구의 집은 투룸 오피스텔이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고, 철현은 거실의 소파에서 담요를 덮고 누웠다. 낯선 천장이 자신의 머리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형광등의 모양도, 벽지의 패턴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맨살에 느껴지는 패브릭 소파의 질감도 낯설었다. 거실의 가구들도, 벽에 붙어있는 시계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도 모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소파 한편에는 전 여자 친구가 요즘 읽고 있는 듯한 책이 한 권 엎어져 있었다. 일본의 어느 작가의 소설집이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철현은 안도의 한 숨울 내쉬었다. 오늘은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서글픈 감정을 느꼈다. 이제 우리는 완벽히 타인이 된 것이었다. 



4

도어록 비밀번호 2115를 누르고, 철현은 두 번째 집의 문을 연다. 이 집에서 자신은 저녁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머문다. 이 집의 주인은 근처에서 편의점을 두 개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에 최저시급이 많이 오르는 데다가, 주변에 새로 다른 브랜드의 편의점들이 문을 여는 바람에 경쟁이 심해져 매출도 떨어졌다. 결국 이 집의 주인은 저녁 시간대의 알바생을 해고하고, 자기가 직접 매일 계산대 앞에 서야 했다.  

    침대 맡에는 항상 같은 편지가 놓여 있었는데, 어린아이를 데리고 유학을 간 아내가 보내온 것이었다. 그 편지와 책상 서랍에 보관된 문서들, 사진들과 그 외 여러 물건들을 통해서 철현은 이 집의 주인의 상황을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업이 잘 나갈 때 아내는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함께 유학을 가기로 했다. 그러나 아내가 해외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사업이 좋지 않게 굴러가는가 싶더니, 결국엔 돌아오는 만기를 갚지 못하고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리저리 돈을 융통한 끝에 그는 다시 대출을 받아 편의점을 두 개 샀지만, 편의점에서 나오는 수익으로는 외국에서의 아내와 아이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남편은 번듯한 집을 팔고, 자신이 운영하는 편의점 중 한 곳 근처에 위치한, 이 좁은 오피스텔로 이사를 왔다. 

    오피스텔의 벽 한쪽에는, 이 좁은 집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 크고 화질이 좋은 티브이가 붙어있다. 반대편 벽에 최대한 붙어 앉아도 전체 화면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그의 사업이 잘 굴러가던 시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이 오피스텔의 모든 사물들을 통틀어 제일 비싼 물건이다. 집주인은 집에 있을 때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 티브이 앞에서 보냈다. 경제 관련한 채널들을 강박적으로 오가면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천 시간 이상을 보았음에도 그는 마땅한 사업 기회를 찾지 못했다. 스마트 티브이의 시청 기록들을 넘겨보면서 철현은 이 집주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헤아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 관련 프로그램들은 그에게는 너무 재미가 없어 도저히 계속 볼 수가 없었다. 


    철현은 자신이 사 온 하이네켄 한 캔을 냉장고에 넣고, 냉장고에 들어있던 시원한 하이네켄 한 캔을 꺼내 들고 티브이 앞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한쪽 벽에 기대어 있던 접이식 좌식 식탁을 꺼내 다리를 편다. 티브이 반대쪽 벽에 등을 기대 자리를 잡고, 티브이를 켠다. TV는 언제나 경제 관련 채널로 고정되어 있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공중파 방송으로 돌린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철현은 자신이 메고 온 큰 가방을 펼쳤다. 가방에는 자신의 옷들과 면도기, 세안 도구와 그 외 개인적인 위생용품들로 가득하다. 남의 집들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럼에도 다른 사람의 옷은 입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규칙이었다. 불가피하게 겉옷을 잠시 빌려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일 년에 겨우 두세 번 있는 일이었다. 가방에는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빨래들도 있었다. 오늘 이 집에서 빨래를 하고, 건조기까지 돌리면 1시 이전에 다시 뽀송뽀송한 새 옷들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전 여자 친구의 집에서 철현은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딱 하루만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나왔다. 그다음 며칠은 몇 안 되는 자신의 친구들의 집을 전전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친구들의 집을 전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집이었다. 하루의 일과가 매일 일정한 사람.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강남이나 역삼 근처의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근처 빌딩의 사무실로 출근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침 여덟 시쯤 오피스텔이 밀집한 이면 도로에서 채 데워지지 않은 공기를 가르며 지하철 역을 향해 행군하는 사람들의 풍경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철현은 그들 중 아무나 고르면 되었다.

    그는 우선 확실한 기준을 정했다. 우선 자신이 남자이기에, 여자가 사는 집에는 머물지 않기로 했다. 또 모르는 채로 공간을 자신에게 내어줄 누군가에게 절대로 어느 종류의 피해도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다음에는 해결해야 할 여러 실제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공용 현관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것은 쉬웠다. 열 건물 중 하나는 0000* 이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퇴근 시간에 누가 봐도 회사원인 것 같은 복장으로, 손에 편의점 봉투를 든 채로, 막 오피스텔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사람들은 철현을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의심도 경계심도 없이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뒤에 서 있는 철현은 쉽게 공용 현관의 비밀번호를 알 수 있었다.

    어려운 것은 집의 도어락 번호를 아는 것이었다. 오피스텔의 현관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자신의 집의 도어락 번호를 신경 써서 숨겼다. 건물에 사는 전체 세입자를 다 알긴 어려워도, 옆집의 사람이 누군지는 대부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쩡거리면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철현은 이런저런 방법을 써서 결국에는 두 집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는 첫 번째 집에서, 저녁 일곱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는 두 번째 집에서, 새벽 두 시부터 아침 여덟 시까지는 자신의 집에 머물렀다.  집과 집들을 이동하면서는 장을 보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혹은 우체국이나 은행 같은 용무를 보았다. 낮동안 다른 사람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그는 저녁에 평온하게 자신의 침대에서 잠에 들 수 있었다. 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같이 일하는 파트너들은 철현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들은 슬럼프 뒤에 철현의 작업의 질이 더 좋아졌다며 즐거워했다. 



5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모든 시간 동안 타인의 집에서 머무른다는 생각은 철현에게도 조금 극단적이어서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몇몇일들이 겹쳐서 철현은 자신의 집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어야 했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날, 철현의 아버지가 좁은 시골길을 운전하다가 사고를 냈다. 1.5톤 트럭은 길을 벗어나서 얕은 내리막길을 지나 소 축사를 덮쳤다.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기둥이 무너지면서 곤히 자고 있던 세 마리의 송아지들과, 두 마리의 다 자란 소가 지붕에 깔려 죽었다. 다행히도 철현의 아버지는 약간의 생채기만 입은 채 무사했으나, 건물과 소들과, 그리고 축사를 다시 수리할 때까지 살아남은 소들을 다른 곳에서 키우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들까지 모두 합쳐서 철현의 부모님은 일억 가까이 되는 금액을 보상해야 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철현은 외동아들이었다. 부모님이 빚을 내어 그 금액을 마련한다 해도 결국에는 그 돈이 자신의 빛으로 상속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당장 그만한 큰돈이 없었다. 돈이 나올 구석을 궁리하고 있던 차에 자신의 사촌이 근처에서 살 집을  구한다는 파트너 한 명의 말을 듣고 철현은 바로 이거다 싶었다.   파트너의 사촌은 강남의 어느 대기업의 빌딩 경비를 맡은 회사에서 야간 근무조로 일하고 있었다. 원래는 근처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는 자신의 친구와 함께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었으나, 친구와 대판 싸운 다음에 막무가내로 짐을 싸서 나와버렸다고 했다. 지금은 잠깐 철현의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얼른 어디라도 좋으니 방을 구하게 해서 내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철현은 파트너에게, 마침 자신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고, 자신의 뒤를 이어서 들어올 세입자를 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철현은 자신의 집을, 자신의 파트너의 사촌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자신의 짐들은 절반은 버리고, 절반은 시골의 부모님 집으로 보내 두었다. 양말, 속옷, 위생용품, 그리고 작업하는데 필요한 노트북, 그 외 몇몇 작은 것들만 모아, 큰 트레킹용 가방에 넣었다. 돌려받은 보증금은 모두 부모님에게 보냈다. 보상금을 내고 남은 이천만 원도 부모님께 드렸다. 언젠가는 자신의 집을 사게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던 꿈이 사라지고 나자 철현은 더 이상 돈을 모으고, 불리겠다는 욕심이 들지 않았다. 어쨌든 당장을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을, 아니 그보다는 넘치게 벌고 있었다.


도어록의 번호 3337을 누르고, 철현은 자신의 세 번째 집의 문을 열었다.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하기 전에, 2년 동안 살았던 바로 그 집이다. 구조는 같았지만 많은 것들이 그때와는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이 곳에서 철현은 매일 새벽 두 시부터 아침 여덟 시까지 머문다. 딱 잠만 자고 나간다. 파트너의 사촌동생은 아쉽게도 취향이 그렇게 고급이지 않았다. 가져온 가구들은 분명히 그렇게 싼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색이나 모양이 예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불만족스러운 것은 침구류였다. 침실은 유행이 지난 지 오래인, 유행이 한참일 때도 철현이 좋아하지 않았던 극세사로 뒤덮여 있었다. 그렇다고 이불, 베개, 침대 커버를 사서 들고 다니기에는 부피가 너무 컸다. 결국 철현은 일주일에 한두 번가량, 섬유 유연제를 듬뿍 넣고 모든 침구를 빠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러면 극세사의 촉감이 일주일 가량은 견딜 만 해졌다. 문제는 이 집에는 건조기가 없기 때문에 도저히 하룻밤 안에 침구류를 빨래하고 건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철현은 똑같은 극세사 침구를 한 세트 더 산 다음에, 두 세트를 번갈아 가며 갈아 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새벽에 돌린 침구류 세트는 오피스텔의 옥상에 널어놓고 다음날 새벽에 돌아와서 갈아 끼면 그만이었다. 

    극세사의 침구류에 둘러싸여서 철현은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파트너의 사촌 동생은 집의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없는 편이어서 천장의 등은 여전히 예전에 철현이 살 때와 똑같은 것이었다. 놓고 간 침실의 옷장도 그대로, 침대 옆에 세워진 장 스탠드도 그대로였다. 침구류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그대로였음에도 이 방은 이제 완벽히 다른 사람의 방이었다. 극세사의 촉감이 그의 신경을 그렇게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철현은 이 침대에서 놀랍도록 깊게,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그리고 언제나 개운하게 일어났다. 


6

크리스마스가 코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철현은 길을 걷다가 백화점 건물의 쇼윈도 너머에 전시된 선물 세트들을 보았다. 첫 번째 집에서 두 번째 집으로 이동하던 도중이었다. "크리스마스,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곳에서 “라는 슬로건 아래에 퐁듀 세트, 보드게임 세트,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크리스마스 시즌에 어울리는 술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면도도 하고, 머리도 단정하고, 따듯한 패딩에 단정한 면바지에 스니커즈를 입은 모습. 어울리지 않게 큰 트레킹 배낭이 볼록했다. 아무리 짐을 늘이지 않기 위해 조심해도 어쩔 수 없이 배낭은 점점 커져갔다. 


봄이는 죽었다. 몇 달쯤 되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건강해지기를 반복해서 집주인의 마음을 여러 번 들었다 놨다 했었다. 철현의 마음 역시 함께 롤러코스터를 탔다. 어느 날, 철현이 첫 번째 집에 들어왔을 때 봄이는 없었다. 봄이의 그릇들은 그 뒤에도 얼마 동안 원래 있던 자리에, 채워진 물과 사료가 줄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장난감들도 거실의 소파 위에 놓여 있었다. 철현은 물이 증발해서 조금씩 사라질 때마다 다시 조금씩 채워 넣었다. 집주인도 같은 일을 종종 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한 달이 조금 지나자 집주인은 봄이의 물건들을 치웠다. 집에서 나던 봄이의 냄새도 점차 희미해졌다. 일주일에 두 번 낮 시간에 오던 애견 돌보미도 더 이상 오지 않았고, 따라서 철현은 애견 돌보미가 방문하는 시간에 맞춰 한 시간가량 집을 비워야 했던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번째 집의 주인은 편의점을 처분하고 작은 사무실을 열게 된 모양이었다. 시간대가 어느 정도 차이나는 해외를 타깃으로 한 사업이었고, 따라서 집주인은 여전히 밤에 출근했다. 철현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사업 아이템을 설명하는 문서를 그는 여러 번 읽어 보았으나,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아도 철현은 그 사업이 성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보다 주인은 활기 있어 보였다. 장도 이전보다 더 자주 보았고, 냉장고에는 레토르트 식품이나 냉동 피자 대신 야채나 과일, 신선한 고기 같은 재료들로 채워졌다. 뚜렷한 목표가 세워지고 나자 비로소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나은 궤도 위로 올리고 싶은 욕구가 뒤따라 생긴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집주인은 외국에 있는 아내와 아이에게 두 어 통 정도의 편지를 받았다. 아이는 부쩍부쩍 자라고, 이제는 아내보다 외국어를 더 잘하게 되었다. 


세 번째 집의 주인은 여자 친구가 생긴 모양이었다. 철현은 소파나 침대에서 머리핀이나 머리 고무줄들을 보았다. 몇 번은 침대 옆 탁자 위에 은색의 찢어진 콘돔 포장지도 놓여 있었다. 처음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 일주일 가량 철현은 세 번째 집에 가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얼마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지 그는 알 필요가 있었다. 철현이 있을 때 그녀가 불쑥 들어온다거나, 그녀가 아직 있을 때 철현이 불쑥 들어온다면 너무나 귀찮은 상황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세 번째 집주인의 여자 친구 역시 그녀의 남자 친구와 같은 시간대에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근처 회사들에게 서버 및 IT 기반시설을 임대해주는 서비스 업체의 고객대응팀에서 야간조로 일 하고 있었다. 애초에 서로 같은 생활 리듬으로 살고 있었기에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철현도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었다. 뻔하다면 뻔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흐르고,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철현은 그 사람에게 자신이 세 집을 오가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여자 친구는 철현의 집에 와보고 싶어 했으나 철현이 곤란해 하자 더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철현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여자 친구의 집은 어느 빌라의 삼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단정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취향이 좋은 사람이었다. 책꽂이에는 소설과 시집들, 그리고 산문집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모두가 다른 빈티지 찻잔들은 모두 유럽의 벼룩시장에서 사 온 것이라 했다. 침구류는 사각거리는 느낌이 좋은 수가 낮은 면 재질이었다. 리투알의 디퓨저가 은은한 향으로 화장실을 채우고 있었다. 그 뒤로 종종 철현은 여자 친구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갔다. 세 번째 집주인의  극세사 이불속 보다 이 곳의 서걱거리는 면 이불속에서 그는 더 깊은 안락함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언제나 그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너무 잘 알게 된다면, 이 공간과 이 곳에 놓인 사물들과 이 사람과의 관계 속에 내가 섞여 들게 된다면, 어느 순간 이 곳에 내가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철현은 더 이상 이 곳에서 잠에 들지 못할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항상 일정 정도 이상의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여자 친구의 집에 방문하는 횟수를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철현은 백화점에 들러 여자 친구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샀다. 같이 마실 와인도 한 병 샀다. 그는 세 집주인들을 위한 선물도 살까 잠깐 고민해보았으나 금방 마음을 접었다. 철현은 그들을 잘 알지만 그들은 철현을 모르고 있을 터였다. 갑자기 선물을 주기에는 구실이 없었다. 철현은 문득 슬픈 마음이 들었다. 이 세 집주인들에 관해서는 자신은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사소하고 내밀한 것들까지 모두. 하지만 이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한다. 비대칭이 너무 심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왜 타인의 집에서만 평온을 느끼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옛 여자 친구와, 그녀의 뒤를 이어 그녀의 집에서 살았던 법대생 친구를 생각해 보았다. 다시 한번 자신의 어린 시절과, 그 시절 자신의 부모님들을 생각해 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계기랄 것 도 없었다. 일은 자연스럽게 흐르고 흘러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철현은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던 소파에 앉고, 다른 사람이 사용했던 컵에 커피를 마시고, 다른 사람이 잤던 침대에서 자는 것을 더 편안하게 느꼈다. 다른 누군가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구축한 작은 세계에서 그 세계를 티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타인으로 머무는 것이 좋았다. 철현에게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계속 그 낯섦이 필요했다.


철현은 문 앞에 서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도어락 비밀번호 2115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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