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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창 응봉 최중원 Mar 13. 2020

공간들에 대하여 : 낙성대 돼지네

서울, 베를린, 함부르크 공간들의 기억

늦은 저녁 낙성대역에서 내려서 봉천동 196–283, 준아카데미 204호까지 걸어 올라오는 길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유혹에 굴복하여 방탕하게 지낸 나날들의 대가로 이젠 작아서 입지 못하는 바지들을 버리며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의 야식은 없다! 하지만 고깃집, 밥집들이 늘어서 있는 이면도로를 무심한 척 지나쳐 골목으로 들어왔을 때, 이젠 유혹이 끝났다며 안심하려는 바로 그 순간,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럽게 나의 결심을 위협하는 최종 보스가 등장한다.


나는 보이지 않아도 먼저 그놈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골목의 초입에서부터 나는 그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먼저 맡을 수 있는 것은 구운 김치 특유의 매콤하고 달콤한 향. 그 향을 맡으며 놈을 향해 다가가다 보면, 어느샌가 나를 포위한 깊고 미끌미끌한 기름의 향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노릿하게 구워진 단백질의 향까지 묵직하게 허리를 받쳐주니, 그야말로 최종 보스가 아닐 수 없다. 방금 밥을 먹고 올라가는 길이라 해도 식욕이 돌 정도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굶주림과 피곤함에 찌들어 있을 때에 그놈의 일격을 받으면, 도저히 버텨낼 도리가 없다.


그래도 야식으로 삼겹살은 좀 부담스럽다. 그래서 나와 민선이는 돼지네의 냄새로 잔뜩 고양된 허기를 삼겹살보다는 조금 덜 부담스러운 메뉴로 채운다. 자주 봉구비어와 느낌이 비슷한 혼노베(예전에는 클로이네였다)에 가서 크림 생맥주에 연필 새우 같은 작은 메뉴를 시켜 먹었다. 혼노베의 사장님이 돼지네의 사장님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돼지네의 냄새 공격이 차곡차곡 적립되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돼지네에 갔다. 보기에는 동네 고깃집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원형 테이블에 원형 스툴이 가게를 빼곡히 채우고 있고, 여기저기서 치익 하고 고기 구워지는 소리가 난다. 이곳의 삼겹살은 얼리지 않은 생고기인데, 두꺼운 무쇠판 위에 고기와 함께 콩나물, 김치를 올려주는 것이 특징이다. 프랜차이즈 고깃집처럼 특이한 소스가 나온다던지, 초벌구이 한 고기가 나온다던지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단 고기가 맛있다. 그리고 구운 콩나물과 김치도 맛있다. 함께 먹는 맥주도 당연히 맛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볶음밥이 진짜 맛있다. 이곳에 오면 꼭 볶음밥을 먹어야 한다. 붉은 양념에 버무린 밥을 무쇠판 위에 올리고, 밥으로 한라산을 만들고, 그다음에는 백록담을 만든 뒤 그곳에 계란 한 알을 투하하고, 적당한 시간을 기다렸다 밥과 함께 섞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절한 손놀림으로 밥을 휘적휘적하다, 주걱에 붙은 밥을 무쇠판에 탁탁 털어내고 불을 끈 다음에 이제 드셔도 돼요-라고 말한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힘들어하고 있었던 우리가 수저를 출동시킬 시간이다. 기름 맛, 매운 김치 맛, 단맛에 계란의 부드러움과 볶아진 밥알의 식감이 입안에서 하나의 소우주를 만들어 낸다. 이러다 따끈따끈 베이커리나 신 중화 일미를 그릴 기세이지만, 정말로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고깃집 볶음밥 중에 최고다.


음식의 맛이나 냄새 말고 돼지네에 대해 다른 것을 말해 본다면, 그룹 일기예보의 멤버 한 명이 지금까지 몇 번 이 곳에서 공연을 했다는 것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공연장이 아닌 골목의 가게에서 공연을 하는 콘셉트인 ‘골목길 콘서트’가 바로 이곳 돼지네에서 시작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적혀있는 현수막이 벽에 걸려 있었다. 일기예보의 멤버와 사장님, 사모님이 같이 찍은 사진도 걸려있다. 약간 어두운 피부톤에,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위로 세운 머리가 멋스러운 사장님이 사진 바로 옆에서 고기를 잘라주고 있다. 머리를 질끈 묶으신 사모님도 홀과 주방을 분주히 오간다. 돼지네 같이 부부가 같이 하는 식당은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가 있다. 특징 없이 단정한 외모를 한 직원들이 어디서 배운 것 같은 똑같은 매너로 서빙하는 프랜차이즈 식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같이 일하는 다른 직원들에게도 그런 분위기가 흘러나온다. 쉽게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이 것이 내 일이라는 애정, 그리고 제일 가까운 사람과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추어 일하면서 쌓인 관계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그런 분위기의 원천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 낙성대를 찾아온 친구와 함께 저녁에 돼지네를 간 적이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늦은 저녁이었고, 새해로 넘어가는 순간까지 그곳에 있었다. 손님들은 거의 다 일어나고, 빈 그릇과 빈 술잔들이 가득한 테이블들 한쪽에서 돼지네의 사장 부부와 직원들이 조촐하게 초콜릿 케이크를 자르며 새해를 맞이했다. 다 먹고 막 일어나려고 하던 우리한테도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주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말했다. 사장님이었는지, 사모님이었는지, 아니면 직원들 중 한 명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동네에 살면서 애정을 품는다는 것은, 이렇듯 마음이 가는 단골집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낙성대에는 내가 아끼는 단골집들이 많았고, 그래서 낙성대를 떠나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돼지네에는 나 대신 다른 단골이 생길 것이고 나 역시 응봉동에, 혹은 이태원에 다른 고깃집을 마음속 리스트에 추가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낙성대에 들릴 일이 있어서 저녁에, 이면도로를 쏘다니다가 그 치명적인 냄새를 맡게 된다면, 그때는 저항을 하지 않고, 백기를 든 상태로 얌전히 그 일격을 온몸으로 받아내고자 한다. 응봉동이나 이태원에 정이 들 만한 고깃집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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