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라이프 16화. 첫 연애 그리고 이별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비슷한 감정과 생각을 품으며, 함께 미래를 기약하는 일은 기적임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엊그제 S와 관계를 정리했다. 큰마음을 먹고 오늘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S는 내가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남자다. 키 190cm에 듬직한 체격을 지녔고 푸른 눈동자와 밝은 금발, 높게 뻗은 콧날만 봐도 전형적인 독일인이다. 그는 베를리너 부모에게서 태어나 줄곧 베를린에서만 살아왔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신은 그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8년 전 어머니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외동이었던 그는 그렇게 혼자가 됐다. 잇따라 할머니와 삼촌, 고모까지 숨을 거두며 가족과 친인척 하나 없이 철저히 혼자 남았다. 20년 가까이 키운 고양이마저 몇년 전 죽었다.
이런 이야기를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말하던 그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홀로 무너졌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감히 위로조차 건넬 수 없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나와 함께 있는 동안 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야말로 S로부터 훨씬 크고 깊은 마음을 받았다. 그는 내가 꿈꿔온 사랑의 모양을 내게 줬다. 늘 간절히 바라왔던 형태의 사랑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마치 제3자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그 순간을 장면으로 기억하려고 애썼다. 한 남자의 심장이 그토록 빠르게 뛸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S는 정말 큰사람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인정한 남자. 그는 자기 인생에 이미 벌어진 일들에 지지 않았다. 현실을 묵묵히 살아갔고, 자신의 상처를 무기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진솔하고 섬세했으며 따뜻하고 책임감 있었다. 마침내 그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여태껏 내 인생이 그렇게 힘들었던 거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우린 참 많이 웃었다. 그는 4년 만난 전 연인과 헤어지고 2년의 공백 후 첫 연애였고, 나는 독일에서의 첫 연애였다. 그래서인지 별것도 아닌 일에 어린아이들처럼 웃음보가 터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둘다 이 관계에 지나치게 진중했다. 어쩌면 이것이 독이 되었던 것 같다.
하루하루 S가 나로 인해 행복해할수록 마음 한켠에는 빨리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번뇌가 들었다. 사실 애당초 나는 독일어 실력이나 늘릴 겸 가볍게 한번 만나보려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S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고, 심지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야 말았다. 문제는 내가 사랑에 빠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놈의 사랑이 도대체 뭐길래...
그는 처절하게 혼자였던 만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길 바랐다. 그것은 S의 유일한 꿈이었다. 나와 연애를 하고 시간이 흐르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고 싶어 했다. 물론 그는 내게 조금의 부담도 주려 하지 않았으나, 더이상 어리지만은 않기에 나는 현실적이고 냉철하게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S는 나보다 6살 연상이었다.
우리 나이에 앞으로 한두번의 인연을 섣불리 맺었다간 시간만 잔뜩 흐르고 자칫 평생 혼자 살게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지금 이 사람이 남은 평생을 함께할 마지막 상대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을 떠올려봤다.
어떤 날은 S와의 관계로 얻게 될 이점들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그가 심리적으로 내게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 비자나 영주권 문제 등이 한번에 해결될 수 있다는 조건들까지. 또 어떤 날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시간이 흐르고 노력한다고 커질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아니'라고 답했다. 이럴 땐 사랑이 지극히 동물적이고 직관적인 영역이라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나는 그에게 결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불가피하다면 나중에 더 큰 상실감을 주느니, 그나마 지금 가장 작은 아픔만 주고 싶었다. 확신이 없는 나를 만나는 탓에 S의 시간과 감정, 돈이 낭비되길 원치 않았다. 나의 마음을 이리 재고 저리 재며 그의 마음을 농간할 순 없었다. 역시 여우가 될 팔자는 못되나 보다. 내가 소중한 만큼 그도 소중했다.
S는 헤어지는 순간에도 미안하다고, 다 자기가 부족해서라고 말했다. 나에겐 그저 고마운 점뿐이라며 많이 고마웠다고... 나와 함께 보낼 크리스마스를 위해 집에 커다란 트리까지 사다 놓은 상황이었다. 그는 진심을 토하며 붙잡았지만 나는 단호했다. 차라리 내게 모질게 굴었더라면 가슴이 덜 아렸을까. 그는 끝까지 너무나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안녕을 고했다.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