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라이프 19화. 빈에서 느낀 작은 희열
[Episode 2] 언어의 희열
영어권이 아닌 국가에서 그 나라의 언어로 여행하는 일은 은은하게 짜릿한 맛이 있었다. 물론 이제는 세계 어딜 가도 웬만한 곳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시대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오스트리아는 같은 독일어권이면서도, 어쩐지 독일 안에서 독일어를 사용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카페와 레스토랑, 미술관과 극장 어딜 가도 직원들은 내게 친절했다. 다른 관광객들처럼 영어를 쓰지 않고 서툴지만 독일어로 말했기 때문일 터다. 구글 리뷰를 보면 인종차별이 심하다던 일부 장소들도 한없이 상냥했던 기억뿐이다. 나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던 사람들과 눈동자를 반짝이며 기특해하던 사람들.
내가 입을 여는 순간 환하게 변하는 그들의 표정에 내심 뿌듯함이 일었다. 역시 생존을 위한 언어와 여행을 위한 언어는 다르고, 이래서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나 보다 싶었다. 같은 언어라도 살이(어디에 기거하여 사는 생활)일 때와 여행일 때의 감도에는 차이가 존재했다.
하루는 부르크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보는 날이었다. 극장 측에서 보낸 메일 주의사항에는 E-티켓을 '반드시' 종이 출력해 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첨부된 메일만으로는 입장시 효력이 없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구글링 후 프린터가 있을법한 스토어를 세네곳이나 찾아갔으나, 계획과 다르게 그 어느 지점에도 프린터는 없었다. 한시간의 고생 끝에 나는 극장으로 향했다. 아직 공연 시작까지는 몇시간이 남은 상태였기에 건물 안은 텅 비어있었다. 다행히 한 남자가 매표소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길래 그분에게 뛰어가 말했다.
"실례합니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제가 오늘 저녁 7시에 리어왕을 예약했거든요. 그래서 티켓 출력을 위해 모든 가게들을 가봤지만 프린터가 없었어요. 저는 오직 E-티켓뿐인데 어떡하죠?" 대충 이런 말을 독일어로 내뱉었다.
그 관계자의 얼굴에 화색이 묻어났다. 제법 나를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컴컴한 극장 건물에 들어와서 다짜고짜 독일어로 질문하는 외국인이라니.
그는 전혀 문제없으니 걱정 말라며, E-티켓에 있는 QR코드 찍어서 입장하니까 이따 보자고 웃어보였다. (아니 그럼 메일에서 그 내용을 지우던가...!) 그래도 괜히 불안할뻔한 일을 확실하게 해두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첫날 숙소 체크인할 때도 스스로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프런트 직원과 독일어로 짤막한 대화를 나눴는데, 한번에 못 알아듣는 부분도 많았지만 두세번씩 다시 들으며 결국 대화를 끝까지 마쳤기 때문이다.
나는 이층 침대에서 위아래 중 어디가 더 괜찮냐고 묻기도 했다. 아무래도 5박이나 지내니까 아래층이 더 편할 거라고 일러준 그녀 덕분에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숙소에 사온 젤리 봉지가 너무 질겨 안뜯겨질 때 역시 프런트에 도움을 요청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미리 연습(?)하지 않고 이렇게 실전에서 바로바로 말할 수 있는 낯짝이 생겼다는 것. 남들에겐 별것 아닐지라도 나에겐 큰 발전이다. 올해는 독일어로 철판 깔고 들이대는 순간을 자주 만들어봐야지. 오히려 여행지에서 살짝궁 자극이 샘솟았다.
언어와 관련된 일화와 느낀점이 많지만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어쩌다 보니 이번 에피소드도 길어졌다. 원래 의도는 딱 한편에 짧은 조각 모음집으로 담으려고 했던 건데... 분량 조절 대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