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라이프 20화. 야경보다 기억에 남을 순간
[Episode 3] "Gott sei Dank"
오스트리아 빈 호스텔에서 묵는 마지막날, 즉흥 당일치기로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향했다. 예정에 없었지만 문득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부다페스트 야경은 보고 가자'는 마음이 확고해져서다. 안그러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
전날밤 어플로 플릭스버스를 무사히 예약한 덕분에 아침 일찍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편하게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세시간도 되지 않아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통권 어플인 '부다페스트고(BudapestGo)'가 전날부터 내내 먹통이었다. 휴대폰을 껐다 켜고, 삭제 후 재다운로드하고 등등- 다 해봤지만 어플 자체 오류였다. 결국 번거롭지만 실물 종이티켓을 발권받아야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역 안으로 들어가 안내소 직원에게 물었다. 그녀가 알려준대로 쭉 걸어가 지하철 타는 방면으로 내려갔더니 승차권 판매기 몇대가 나란히 있었다. 24시간 이용패스(24시간 동안 부다페스트 내 모든 대중교통 이용 가능)를 선택하고 돈을 넣으려는 찰나, 아뿔싸...!
나는 헝가리 화폐인 '포린트'가 하나도 없었다. 티켓 발권 후 미리 알아봐둔 시내 환전소에 갈 계획이었는데, 생각해보니 당장 교통티켓 살 포린트가 전혀 없었다. 순간 벙쪘지만 마침 한 청년이 내 옆에 있는 기계로 와서 표를 끊었다. 나도 모르게 이미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그가 나 대신 포린트로 티켓을 사주면, 내가 액수에 맞는 금액을 유로를 줘도 괜찮겠냐고 부탁했다. 24시간권은 2500포린트였다. 6유로 조금 넘는 금액이다. 청년은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심지어 금액보다 덜 줘도 상관없으니 자기가 대신 티켓을 끊어주겠다고 했다. 내가 10유로 지폐를 주자 그는 2000포린트(거의 5유로)를 돌려줬다. 승차권 나오는 부분 뚜껑이 많이 뻑뻑하다며 티켓도 나 대신 열심히 꺼내줬다.
내가 자꾸 독일어를 섞어 말해 당황하자 그는 웃으면서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지만 독일에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참고로 헝가리는 헝가리어를 사용해서 서로 영어로 대화했다.
정말 고맙다고 다시 한번 인사한 뒤 우린 각자 갈길을 떠났다. 이름도 모르는 한 청년의 호의와 친절 덕분에 부다페스트의 첫인상이 참 좋게 기억될테지. 역시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
이후 부다페스트에서 멋진 하루를 보낸 후 포린트가 어중간하게 남았다. 도로 가져가봤자 어차피 쓰지도 못하기에 근처 드럭스토어를 찾아 들어갔다. 고심 끝에 피부보습 팩을 4개 골랐다. 평소 매일 하는 데다가 부피 차지도 안하고 가볍지, 무엇보다 금액이 딱 맞아떨어졌다.
때마침 빈으로 돌아가는 야간 고속버스 타러 갈 시간도 됐다. 야무진 스스로를 기특해하며 트램을 기다렸다. 그런데 뿌듯함도 잠시. 눈앞에서 트램을 두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전광판에 작은 화살표 표시가 뜨면 건너편에서 온다는 뜻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두대나 허무하게 보낸 것이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세번째 트램마저 놓치거나 연착되면 고속버스를 못타게 생겼기 때문이다. 내일이 빈 호스텔 체크아웃하는 날이라 더욱 똥줄이 탔다. 베를린행 기차표도 이미 사놓은 상태였다. 모든 짐과 여윳돈은 숙소에 있었다. 나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앞선 트램들은 시간 맞춰 잘만 출발했으면서 내가 타야 할 트램은 1분, 2분 자꾸 조금씩 늦어졌다. 일분이 한시간처럼 느껴지는 초조함 끝에 간신히 트램을 탔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다. 또 한번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환승을 해야 했다. (오전에 부다페스트 도착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지역, 다른 장소였다)
트램에서 내리자마자 구글지도를 보고 미친듯이 달렸다. 1분 1초가 급박했다.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그런지 지하철역이나 버스정거장이 도통 보이질 않았다. 저쪽에 기차 몇대가 정차해 있길래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거기로라도 일단 뛰어가봤다. 구글지도에는 이 기차를 타도 목적지에 간다고 나오긴 하는데...
반쯤 넋이 나간 채 열차에 올라탔다. 한 청년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혹시 이 기차가 맞는 방향인지 물었다. 그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나를 데리고 기차 밖으로 나와서는, 내가 어떤 열차를 타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려줬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저 기차를 타면 된다고 짚어줬다.
나는 정말 고맙다고 울먹이며 인사한 뒤 전력질주했다. 그가 알려준 기차 바깥에 역무원 한분이 계시길래 그분에게 뛰어갔다. 오전에 샀던 24시간 패스권을 보여주며 이 기차에도 유효한지 물었다. 보통 지하철, 트램, 버스만 되고 기차는 예외인 경우가 많아서 물으면서도 거의 반포기 상태였다. 하지만 다행히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예!!!
다음역에서 내리자마자 한바탕 또 우당탕탕 헤매고 눈앞이 새하얘지는 경험을 한 뒤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렇게 나는 빈으로 돌아가는 플릭스버스에 몸을 싣는 데 성공했다. 2분만 늦었어도 버스가 떠났으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심장 쫄깃했던 이날밤.
버스 좌석에 앉자마자 나도 모르게 "Gott sei Dank"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께 감사합니다', '다행이다'라는 뜻이다. 타고있던 기차에서 내리면서까지 나를 도와준 그 청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 웃으며 이 글을 쓰지 못했겠지. 부다페스트, 그 시작과 끝에 존재했던 것은 다정한 선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