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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입춘을

독일라이프 21화. 햇살을 알아볼 수 있도록

by 모모


24절기, 그중 첫번째 절기인 입춘. 봄의 시작을 알리기라도 하듯 오늘 베를린은 하루종일 '맑음'이었다. 입춘이 되자 거짓말처럼 햇살이 이 도시를 포근히 껴안았고 쾌청한 바람에 봄내음이 묻어났다. 마음이 선덕선덕한 것이- 어느 봄날 태어나 작년 봄에 독일에 와서 그런지, 설렘으로 물들었다.


동양의 계절적 구분을 서양에 살고있는 내가 이토록 흠뻑 느끼는 모습이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날씨와 계절에 민감한 사람인 걸 어쩌겠나. 독일에서 처음 겨울을 겪고나니 온몸의 감각은 더욱 또렷해졌다. 음습하고 먹먹했던 시간 속 치열하게 고독했다.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비로소 손아귀에서 놓아줬다. 하루는 모래성이 됐다가 하루는 진흙탕이었던 어떤 것을. 붙들수록 새어나가다 결국엔 무너지고, 담글수록 더러워지다 나를 집어삼켰던 것을. 깨끗하고 가벼워진 양손을 펼쳐 새로운 행복 조각들을 주웠다.


산뜻한 베를린 공기를 들이마시며 귀엽고 독특한 물건을 잔뜩 파는 소품샵으로 향했다. 얼마전 알게된 프랜차이즈 잡화점인데,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건너와 베를린 곳곳에 있다. 오늘 나의 선택은 벚꽃 모양 티스푼과 손바닥 만한 뱀부 수납상자, 1kg짜리 덤벨 두개, 스트레칭 밴드.


백팩에 차곡차곡 넣은 후 카페로 갔다. 겨울 내내 뜨거운 커피만 마시다 얼음 동동 띄운 콜드브루를 주문했다. 카푸치노, 라떼 마끼아또,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시원한 바닐라라떼로 목을 축인 적이 얼마만인지. 햇볕을 즐기는 창밖 인파를 이따금 바라보며 앤서니 도어의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편을 몇 페이지 남기고 다 읽었다.


사실 2월은 이루고 싶은 작고 선명한 목표가 생겼다. 행복 장치도 여러개 심어놨다. 모호하지만 거대한 기대보다 작지만 명확한 희망이 힘을 줄 때가 있다.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은 현재진행형이고 미래진행형일 테지만, 굴복 대신 스스로의 최선까지는 해보려고.


내일도 베를린은 맑음이다. 이틀 연속 귀한 일기예보에 미소가 지어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엉뚱한 생각이 서린다. 나를 베를린의 햇살처럼 여겨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얼마나 소중한지 사무치게 아는 그런 사람을. 언젠가 당신과 내가 마주하면 우린 서로를 알아보겠지.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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