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독립출판사를 만들었다

독일라이프 23화. 사치의 탄생

by 모모


1인 독립출판사를 만들었다.


이름은 Sachi(사치). 사유와 치유의 줄임말이다. 말 그대로 사치라는 뜻이기도 하다. 슬로건은 "당신만의 작은 사치를 누릴 시간"이다. 단 한명의 독자라도, 대단하지 않더라도, 작은 사치를 누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책 한권을 사읽는 소소한 사치를 통해 잠시라도 사유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순간을 갖는 것.


지난달 26일 출판사 신고와 사업자 등록을 완료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이 소식을 알렸는데 정말 많은 친구들이 응원해줘서 놀랐다. 좁고 깊은 인간관계로 인해 팔로워도 고작 몇십명뿐이지만, 그들 대부분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왔다. 힘이 되는 든든한 한마디부터 꾹꾹 눌러담은 장문의 메시지까지. 냉소와 불안의 시대에 과분한 마음들을 받았다. 이 얘기는 추후 따로 남겨보려고 한다.


사실 독립출판사를 차리겠다는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했다. 세월 속에서 여러 이유로 희미해졌지만. 그러다 다시 불씨를 지핀 것은 최근의 일이다. 기자이자 콘텐츠크리에이터였던 경력을 살려 독일 내 미디어 회사와 한국 언론사의 해외 통신원으로도 지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 떨어진 상황이었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조각배의 심경을 거쳐 위기를 기회로 바꿔보자고 다짐했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일할 때도 회사 명함 빼면 업무의 A to Z, 취재비까지 전부 혼자 힘으로 했다. 물론 그 작은 명함 한장의 힘이 크다는 사실을 안다. 그로부터 오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비롯해 외부의 시선과 대우 차이를. 하지만 이조차 내가 만든 두려움이었다. 나에게 회사라는 울타리는 필수적이지 않다. 못할 게 뭐야? 대담해지기로 했다.


살면서 늘 '나의 일'을 해보고 싶었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진 몰랐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을 그때로 만들자. 직접 출판사를 차리고 에세이부터 시, 인터뷰집, 예술·철학서, 그림책, 매거진, 오디오북까지 매번 구상만 했던 것들을 실현해보자고 말이다. 하나씩 차근차근, 가늘고 길게, 평생에 걸쳐서.


이걸로 먹고살 수 없다는 건 잘 안다. 한국에 돌아가면 고정적인 수입을 책임질 수 있는 일은 따로 하고 사이드잡으로 해나갈 계획이다. 다만, 적어도 베를린에 있는 동안 그 기반을 확실하게 만들어 놓고 싶다는 욕심이다. 우선 아이덴티티와 콘셉트만이라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출판사 홈페이지를 제작한 뒤 독일 내 한인 커뮤니티 두곳에 가입해 글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에 처음으로 글을 올려봅니다.

한국의 스타트업 언론사에서 5년간 기자로 일하다 퇴사 후 무작정 베를린으로 온 지 일년이 다 되어가네요. 독일에 살며 꼭 도전해보고 싶었던 프로젝트가 있어 용기 내어 이렇게 인터뷰이를 모집합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모아 하나의 책으로 엮어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얼마전 제 독립출판사를 만들었고, 이 인터뷰집에 동참해주실 분들을 찾기로 했습니다. 창업가, 예술가, 직장인, 학생, 주부 혹은 저처럼 무직- 정말 맨땅에 헤딩으로 오신 분들까지 모두 환영합니다.

현재 구상해놓은 인터뷰집의 제목은 <정답은 없다, 이야기만 있을 뿐>입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고 각자의 이야기만 있다는 뜻입니다. 우선 e-book(전자책) 또는 온라인 매거진 형태로 발간하고, 가능하면 한국에 돌아가 종이책으로도 출간할 계획입니다.

베를린은 대면/서면 인터뷰 중 선택 가능하며 타지역은 아마도 줌/서면 인터뷰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인터뷰이로 참여하시고 싶거나 궁금하신 점은 ****로 편하게 연락주세요. 저에 대한 소개와 간략한 경력 포트폴리오도 보내드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동안 조회수가 거의 600에 달했다. 그중 실제로 문의 연락을 준 사람은 한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다. 물론 메시지를 보냈다고 인터뷰 참여까지 모두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관심은 가졌으나 결국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여긴 분에게는, 프로젝트의 개선을 위해 정중히 피드백을 요청해 얻었다. 역시 인생은 쉽지 않고 순간순간 약해빠진 자신을 마주했다.


하지만 스스로 이 알을 깨뜨려야만 진짜 어른, 독립된 개체로 거듭날 수 있음을 안다. 한명한명 응대하는 과정에서 무작정 저지른 인터뷰집 프로젝트의 형태가 조금씩 잡혀가고 있다. 게다가 말만 하면 언제든지 도와주겠다는 지원군들도 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베를린에 사는 지인에게 나의 소식을 전해준 친구도 있다. 혼자인 것 같지만 혼자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 온기가 번진다.


독일에 살며 더욱 확실해진 점은 내 인생에서 글쓰기와 예술은 결코 빼놓을 수 없고, 인간의 정신건강과 심리에 대한 고찰 역시 평생 함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기록과 창작을 통해 스스로를 돌보고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더 큰 위로와 깨달음을 얻는다고.


사치는 이렇게 탄생했다. 글을 쓰고 읽는 행위에는 셀프케어, 셀프테라피 효과가 있음을 아는 누군가로부터. 그녀는 생각한다. 인생의 주파수가 같은 이들과 문장을 나누는 일을 '마음 에스테틱'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사치(Luxury) 아닐까.



p.s 아침에 눈떠보니 인터뷰이 참여 요청 연락이 더 와있다. 동시다발적으로 혼자 여러가지 일을 밀도 있게 하려니 갑자기 몸이 하나로 모자라졌다. 마음 급하게 먹지 말자. 차분하게 하나씩 해보자. 할 수 있다. 이래 봬도 온실 속의 잡초였던 (화초 아니고) 인생 짬바가 있다.



keyword